
100년 전이라고 하면 아득한데, 1926년에 일어난 일들을 늘어놓으면 생각보다 익숙합니다.
그해 달력
| 날짜 | 일어난 일 |
|---|---|
| 4월 25일 | 순종 승하 |
| 6월 10일 | 6·10 만세운동 |
| 8월 4일 | 윤심덕과 김우진, 현해탄 투신 |
| 10월 | 나운규 「아리랑」 단성사 개봉 |
넉 달 사이에 이 일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순종의 장례가 불씨가 된 만세운동
3·1운동이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일어났다면, 6·10 만세운동은 순종의 인산일에 맞춰 일어났습니다. 7년 만이었어요.
올해가 100주년이라 기념사업이 여럿 진행 중입니다.
| 기념사업 | 내용 |
|---|---|
| 기념우표 | 우정사업본부, 48만 장 발행 |
| 학술행사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의정원홀 국제학술심포지엄(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광복회) |
| 박물관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콜로키움 |
사의 찬미와 현해탄
윤심덕은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도쿄음악학교를 다닌 성악가였습니다. 「사의 찬미」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노래예요.
1926년 8월 4일 새벽,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던 배에서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바다로 뛰어듭니다. 시신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 노래를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음반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지금 예순 넘으신 분들은 부모님이 흥얼거리시던 것을 들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리랑」이라는 영화
같은 해 10월 단성사에서 개봉합니다. 흑백 무성영화였어요.
나운규가 각본과 감독과 제작을 하고 주연까지 맡았습니다. 1인 4역이었던 셈이죠. 주인공 최영진은 정신을 놓은 청년으로 나옵니다. 검열을 피하려는 장치였다는 해석이 있어요.
올해 한국영화학회가 「아리랑 100년」 학술대회를 열었습니다.
100년 뒤에서 보면
1926년은 3·1운동이 지나고 광복은 아직 19년 남은 시점입니다. 가장 답답했을 시기예요.
그런데 그 해에 만세운동이 있었고 영화가 나왔고 노래가 팔렸습니다. 억눌린 시기에도 사람들은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6·10은 어떻게 준비됐나
순종이 4월에 승하하고 인산일이 6월 10일로 잡힙니다.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있었어요.
그 사이 여러 갈래에서 준비가 진행됩니다. 학생 단체, 사회주의 계열, 천도교 계열이 각각 움직였습니다. 서로 완전히 연결되지는 않았어요.
일제도 3·1운동을 겪은 뒤라 경계가 삼엄했습니다. 인산일에 맞춰 전국에서 경찰과 군대를 서울로 모았어요. 사전에 발각돼서 인쇄물과 조직이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날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규모는 3·1운동에 못 미쳤지만 의미가 있었어요.
이 경험이 4년 뒤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이어집니다. 학생이 운동의 주체로 나선 흐름이 여기서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아리랑은 어떤 영화였나
필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줄거리는 당시 신문 기사와 관람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주인공 최영진은 서울에서 공부하다 정신을 놓고 고향에 돌아온 청년입니다. 마을에 지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오기호라는 인물이 있고, 그가 영진의 여동생을 겁탈하려 합니다. 영진이 낫을 들어 오기호를 죽이고, 그 순간 정신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순사에게 끌려가면서 아리랑이 흐릅니다.
주인공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설정한 것이 검열을 피하려는 장치였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미친 사람이 한 일이라고 하면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영화가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나운규는 스타가 됩니다. 다만 그는 서른여섯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 시절 극장은 어떤 곳이었나
단성사는 1907년에 문을 연 극장입니다. 지금 종로3가 쪽에 있었어요.
무성영화라 소리가 없었습니다. 대신 변사가 있었어요. 화면 옆에 서서 대사를 읊고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입니다. 목소리 하나로 여러 배역을 소화했고, 인기 변사는 배우만큼 유명했습니다.
악단이 들어가 반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한 편이 공연에 가까웠던 셈이에요.
지금 여든이 넘으신 분들 중에는 어릴 때 변사가 있는 극장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유성영화가 들어오면서 1930년대에 사라졌습니다.
1926년의 물가와 생활
그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숫자들이 있습니다. 다만 자료마다 편차가 커서 대략의 감으로만 봐 주세요.
일반 노동자 월급이 30원 안팎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 60만 원이 얼마나 큰 액수였는지를 이 기준으로 가늠하곤 하지요.
이 시기 조선의 인구는 2천만 명이 채 안 됐습니다. 대부분이 농촌에 살았고, 문맹률이 높았어요. 영화를 보고 음반을 사는 사람은 도시의 일부였습니다.
그래도 「사의 찬미」가 팔리고 「아리랑」이 흥행했다는 것은, 그런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100년이라는 거리
1926년에 스무 살이던 사람은 1945년에 서른아홉이었습니다. 광복을 장년으로 맞은 세대예요.
그 사람들의 자녀가 지금 일흔에서 여든입니다. 그러니까 1926년은 지금 어르신들의 부모 세대가 젊었던 해입니다.
백 년이 아득해 보이지만 두 세대만 거슬러 가면 닿습니다. 집안에 오래된 사진첩이 있으시면 한 번 꺼내 보셔도 좋겠어요.
순종이라는 임금
1926년의 시작이 순종의 승하였으니 그에 대해서도 몇 줄 적겠습니다.
순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입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물러난 뒤 즉위했고, 3년 뒤 나라가 넘어갑니다. 재위 기간이 3년밖에 안 됐어요.
병합 뒤에는 창덕궁에 머물렀습니다. 이왕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사실상 연금 상태였다는 서술이 많습니다.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쉰세 살이었어요.
사람들이 그의 장례에 모인 것은 그를 향한 마음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마지막 임금이 간다는 것은 나라가 정말로 끝났다는 실감이었을 테니까요. 그 자리에 만세 소리가 나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해에 태어난 사람들
1926년에 태어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열아홉에 광복을 맞고, 스물넷에 전쟁을 겪습니다. 서른아홉에 산업화가 시작되고, 예순둘에 민주화를 봅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 식민지와 전쟁과 산업화와 민주화가 다 들어가는 겁니다. 이런 세대가 세계사에서 흔치 않습니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백 살입니다. 많지 않으시겠지요.
기록이 사라진다는 것
「아리랑」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는 대목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당시 조선에서 만든 영화 가운데 온전히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전쟁을 겪었고, 보관 개념도 없었고, 필름 자체가 불에 잘 타는 재질이었어요.
「아리랑」이 일본에 한 벌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돌았습니다. 여러 차례 확인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기록은 남겨야 남습니다. 집안의 사진이나 편지도 마찬가지예요. 어른들께 여쭤 볼 수 있을 때 여쭤 두는 것이 좋습니다.
사의 찬미가 오래 남은 이유
노래 하나가 백 년을 갑니다. 지금도 제목을 들으면 멜로디가 떠오르는 분이 계실 거예요.
가사가 어둡습니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냐로 시작합니다. 삶이 헛되다는 이야기예요.
그 노래를 부른 사람이 며칠 뒤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와 그의 죽음이 떼어지지 않게 됐어요.
당시 신문이 크게 다뤘고 소문이 퍼졌습니다. 두 사람이 살아서 유럽으로 갔다는 이야기까지 돌았어요. 확인된 것은 배에서 사라졌다는 사실까지입니다.
노래가 오래 남은 데는 이 이야기가 한몫했을 겁니다. 다만 그 이전에 노래 자체가 사람들 마음에 닿았던 것이겠지요.
출처
· 순종 승하, 6·10 만세운동, 나운규 「아리랑」: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6·10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우표 48만 장과 학술행사: 우정사업본부 및 언론 보도
· 윤심덕과 「사의 찬미」: 백과사전 및 언론 보도
· 6·10 만세운동 준비 경위, 단성사와 변사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확인하지 못한 것 — 「아리랑」 줄거리는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당시 기사와 증언으로 재구성된 것이며 세부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주인공 설정이 검열 회피 장치였다는 것은 해석입니다. 1926년 노동자 월급 30원과 인구 수치는 대략의 기준이며 자료마다 편차가 큽니다. 「사의 찬미」를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음반으로 보는 것은 널리 쓰이는 평가이나 무엇을 최초로 볼지에 대한 기준이 연구자마다 다릅니다. 「아리랑」의 정확한 개봉일은 자료마다 10월 1일과 10월 5일로 갈립니다. 필름 원본은 남아 있지 않아 내용은 당시 기록과 증언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투신은 생존설을 포함한 여러 이야기가 돌지만 확인된 것은 두 사람이 배에서 사라졌다는 사실까지입니다.
※ 이 글에는 백 년 전 인물의 죽음에 관한 역사적 서술이 포함돼 있습니다. 마음이 힘드신 분은 도움을 받으실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자살예방상담전화 109, 정신건강위기상담전화 1577-0199로 하루 24시간 상담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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