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여섯, 열일곱 살 소녀들이 보따리 하나 들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구로동 공장에서 미싱을 밟고, 저녁이면 야간학교에 가고, 월급봉투는 뜯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부쳤습니다. 그 시절을 산업역군이라 불렀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그냥 '공순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감정보다 숫자가 먼저 필요합니다. 그 숫자들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구로공단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시작은 법이었습니다. 1964년 9월 14일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만들어졌고, 이듬해부터 구로동 일대에 공단이 들어섰습니다.
| 단지 | 착공 | 준공 | 위치 |
|---|---|---|---|
| 제1단지 | 1965년 3월 | 1967년 4월 | 서울 구로동 |
| 제2단지 | 1967년 10월 | 1968년 6월 | 가리봉동 |
| 제3단지 | 1970년 | 1973년 | 가리봉동, 광명 철산동 |
1967년 말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은 2,460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십 년 남짓 만에 십만 명 단위로 불어납니다.
공단이 어떤 곳이었는지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당시 공단의 표어입니다. "노동력 70퍼센트, 기계 30퍼센트."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돌아가는 곳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의 여덟 할가량이 여성이었습니다.
수출의 십 분의 일을 만든 손
구로공단이 우리 경제에서 어떤 자리였는지는 수출액으로 드러납니다.
| 연도 | 구로공단 수출액 | 비고 |
|---|---|---|
| 1966년 12월 | 13만 9,893달러 | 입주업체 첫 수출 |
| 1971년 | 1억 달러 | 국가 전체 수출 10억 달러 시점 |
| 1977년 | 11억 달러 | 국가 수출 100억 달러 달성 해 |
| 1980년 | 18억 7천만 달러 | |
| 1988년 | 42억 달러 | 정점 |
| 1999년 | 15억 달러 |
1977년 우리나라가 수출 백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그중 십일 억 달러가 구로공단에서 나왔습니다. 전체 수출의 십 분의 일입니다. 가리봉동 고가도로에 붙은 '수출의 다리'라는 이름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 정직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구로공단의 근로자 수가 언제 가장 많았는지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국가기록원은 1978년 말 11만 4천여 명이라 기록하고 있고, 산업단지공단 계열 자료는 1987년 7만 3,195명이 정점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두 수치는 동시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집계 범위가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남자의 절반도 안 되던 임금
이제 임금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가장 무겁습니다.
노동부의 직종별 임금실태조사를 정리한 자료를 보면, 1980년 여성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남성의 42.9퍼센트였습니다. 남자가 십만 원을 받을 때 여자는 사만 삼천 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 연도 | 남자(원) | 여자(원) | 여자/남자 |
|---|---|---|---|
| 1980년 | 222,956 | 95,692 | 42.9% |
| 1983년 | 339,664 | 153,475 | 45.2% |
| 1985년 | 386,346 | 180,319 | 46.7% |
| 1988년 | 448,895 | 233,638 | 52.0% |
같은 시기 구로공단 여공의 월급봉투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1980년대 초 구로공단 여공이 받은 월급봉투에 74,166원이 찍혀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이것저것 떼고 손에 쥔 돈입니다. 1980년 여성 전체 평균이 구만 오천 원가량이었으니, 그보다도 낮았습니다.
비교를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1969년 경제기획원 통계로 도시 노동자 한 사람이 최저 생활을 하는 데 드는 돈이 월 16,094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무렵 평화시장 시다의 최고 월급은 삼천 원이었습니다. 최저 생활비의 오 분의 일에도 못 미쳤습니다.
주 오십사 시간, 그리고 열여섯 살
노동시간은 어땠을까요.
통계청이 정리한 제조업 월평균 노동시간은 1970년 232시간, 1986년에 237.7시간으로 가장 길었습니다. 주당으로 환산하면 54.7시간입니다.
| 연도 | 제조업 주당 노동시간 |
|---|---|
| 1985년 | 53.8시간 |
| 1986년 | 54.7시간(정점) |
| 1988년 | 52.6시간 |
| 1991년 | 49.3시간 |
법은 어땠느냐 하면, 1953년에 만들어진 근로기준법은 하루 여덟 시간, 주 사십팔 시간을 기준으로 삼되 당사자가 합의하면 주 육십 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여성과 열여덟 살 미만은 밤 열 시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일할 수 없다고 정했지만, 인가를 받으면 예외였습니다. 주 사십사 시간으로 줄어든 것은 1989년의 일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나이도 봐야 합니다. 한 연구가 정리한 1981년 구로공단 노동자 오만 팔천여 명 가운데 스무 살 이하가 35퍼센트, 스물다섯 살 이하가 60퍼센트였습니다. 1970년대 초 조사로는 여공의 절반이 십 대였다고 합니다.
학력은 이렇습니다. 문맹 20퍼센트, 초등학교 중퇴 15퍼센트, 초등학교 졸업 51퍼센트. 합치면 국졸 이하가 86퍼센트였습니다. 중학교를 나온 사람이 여덟 명 중 한 명이 안 됐습니다.
벌집방, 변기 하나에 스물여섯 명
이들이 살던 곳이 이른바 벌집이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벌집을 "6.6제곱미터 남짓한 공간"이라고 적었습니다. 두 평 남짓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두 평 정도의 방에 서너 명이 살았고, 화장실 하나를 수십 명이 함께 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83년에 나온 한 연구는 벌집 구조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오십 평에서 백 평쯤 되는 이삼 층 양옥에 각 층마다 방을 열 개 남짓 들였고, 집 한 채의 평균 방 개수가 21.6개였습니다. 같은 시기 서울 불량주택지구의 평균이 2.93개, 일반주택이 3.81개였으니 비교가 됩니다. 그리고 이 연구가 계산한 변기 하나당 평균 사용 인원은 스물여섯 명이었습니다.
방 앞에는 연탄아궁이와 수도꼭지가 있었고, 대부분 허가 없이 증축한 건물이었습니다. 1975년 가리봉동은 서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동이었습니다.
공장에서 학교로, 하루 열아홉 시간
그 좁은 방에서 나와 공장으로 가고, 공장에서 나와 학교로 가는 삶이 있었습니다.
1976년 교육법이 개정되어 1977년부터 산업체 부설학교와 산업체 특별학급 제도가 시작됩니다. 근로자 천 명 이상인 회사는 학교를, 백 명 이상인 회사는 특별학급을 둘 수 있게 했습니다. 수업료와 공납금은 면제였고, 정규 학교 수업시간의 삼 분의 이만 채워도 같은 학력을 인정받았습니다.
| 연도 | 부설학교 고등학생 | 특별학급 고등학생 |
|---|---|---|
| 1983년 | 28,413명 | 35,713명 |
| 1985년 | 33,604명 | 54,332명 |
| 1987년 | 44,104명 | 65,072명 |
| 1997년 | 7,956명 | 13,034명 |
1987년이 정점이었습니다. 부설학교와 특별학급을 합쳐 십일만 명 가까이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습니다. 백과사전은 부설학교 학생의 대부분이 여학생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경기도 한 회사의 부설 중학교는 1980년 입학생 240명 가운데 193명이 여학생이었습니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의 전시 자료가 전하는 하루는 이렇습니다. 아침 여덟 시에 공장에 들어가 오후 다섯 시에 나오고, 저녁을 먹고 여섯 시부터 열한 시까지 다섯 시간 수업을 듣고, 집에 와 숙제를 합니다. 평균 수면 시간이 여섯 시간이었습니다.
1997년이 되면 부설 중학교는 전국에 한 학급만 남습니다.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필요가 사라진 것이지요.
1985년 6월, 엿새 동안의 일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1985년 6월 22일 오전,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 위원장과 사무국장, 여성부장 세 사람을 연행해 구속했습니다. 그해 사월 임금 인상 투쟁을 문제 삼은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인근 사업장 노조 간부 이백여 명이 모여 동맹파업을 결의했고,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엿새 동안 파업이 이어졌습니다.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에서 약 1,400명이 동맹파업에 참여했고, 지지 연대까지 합치면 2,500여 명이었습니다.
회사 측은 농성 엿새째까지 전기와 수도를 끊었습니다. 29일 농성장이 강제 해산되면서 파업은 끝났습니다.
결과는 무거웠습니다. 구속 43명, 불구속 입건 38명, 구류 47명. 그리고 해고되거나 강제로 사직한 사람이 자료에 따라 칠백 명에서 이천 명에 이릅니다. 대우어패럴은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일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일어난 동맹파업으로 평가됩니다. 참여자 다수가 이십 대 초중반 여성이었습니다. 구속자 명단을 보면 효성물산 다섯 명, 가리봉전자 세 명이 모두 여성이었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는
구로공단은 2000년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로 나뉘어 있고, 만 개 가까운 회사에 십육만 명이 일합니다. 미싱 대신 컴퓨터가 돌아갑니다.
그 시절을 기억하려는 곳도 생겼습니다. 2013년 5월 금천구가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을 열었습니다. 여공들이 살던 벌집을 그대로 복원해 놓았고, 교과서와 라디오, 신발, 연탄 같은 것들이 놓여 있습니다.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지정되었습니다. 구로구에는 2021년에 문을 연 지밸리산업박물관이 있고, 서울역사박물관은 2015년에 가리봉동을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습니다.
수출 백억 달러라는 숫자는 교과서에 남았습니다. 그 십 분의 일을 만든 사람들이 두 평 방에서 서넛이 자고, 변기 하나를 스물여섯 명이 나눠 쓰고, 남자의 절반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그 월급을 고향에 부쳤다는 사실은 교과서에 잘 남지 않습니다.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 가운데 그때 가리봉동에 계셨던 분이 계실 겁니다. 그 시절을 부끄럽게 기억하실 이유가 없다고, 저는 이 숫자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출처 및 참고
· 공단 조성 연혁, 1967년 근로자 2,460명, 수출액 추이, 표어, 벌집 6.6제곱미터, 월급봉투 74,166원: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경제·산업 > 구로공단」
· 1988년 수출 42억 달러, 입주업체 수,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전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로공단」
· 성별 월평균 임금(1980~1988년): 한국노동연구원 『한국의 여성노동시장』(1991), 원자료 노동부 『직종별 임금실태조사보고서』
· 제조업 노동시간: 통계청 『통계로 본 광복 70년』, 원자료 노동부 『매월노동통계』
· 1953년 근로기준법 조항 및 개정 이력: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1969년 최저생활비와 평화시장 시다 임금: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전태일」
· 벌집 구조와 변기 사용 인원, 1981년 연령 분포: 김영기 「구로공단 인근의 노동자 및 저소득층 주거개선 방안에 관한 연구」(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3)를 인용한 언론 보도
· 벌집 서술과 가리봉동 인구: 서울역사박물관 「가리봉 오거리」 특별전(2015년) 및 2013년 생활문화자료조사
· 산업체 부설학교·특별학급 제도와 학생 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자료 교육부 『교육통계연보』. 경기도 사례는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정책보고서(2024년)
· 구로동맹파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로동맹파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 노동자생활체험관: 금천구청 공식 자료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근로자 수 정점은 국가기록원(1978년 11만 4천 명)과 산업단지공단 계열(1987년 7만 3천 명)이 어긋나며, 집계 범위 차이로 보이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여성 비율은 "약 80퍼센트"라는 서술만 있고 연도별 공식 통계는 찾지 못했습니다. 벌집의 임대료 금액은 어떤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적지 않았습니다. 구로동맹파업 해고자 수는 700명에서 2,000명까지 자료마다 크게 다릅니다. 연령·학력 분포는 전시 자료와 학위논문을 인용한 보도에 근거한 것으로, 원 조사 기관이 명시되지 않은 대목이 있습니다.
통계는 발표 시점 자료이며 이후 갱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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