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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라디오와 흑백텔레비전, 세상이 거실로 들어오던 날

by 인생의 쉼표 2026. 8. 27.

동네에서 텔레비전 있는 집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이면 그 집 마루에 사람이 가득 찼고, 만화가게는 만화 손님을 내보내고 텔레비전 손님을 받았습니다. 다방은 문 앞에 "오늘 김일 레슬링"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이건 추억담이 아니라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기록입니다. 오늘은 라디오와 흑백텔레비전이 우리 집 안방으로 들어오던 시절 이야기를 숫자와 함께 해 보려 합니다.

국산 라디오 1호, 그리고 석 달치 월급

먼저 라디오입니다.

국산 라디오 1호는 1959년 11월 15일 금성사가 만든 A-501입니다. 오구 진공관에 오 인치 스피커를 단 물건이었고, 그해 만든 것이 여든일곱 대였습니다.

값이 이만 환이었습니다. 그때 금성사 대졸 사원 월급이 육천 환이었으니 석 달치 월급이 넘는 값입니다. 그래도 수입 라디오의 삼분의 이 수준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라디오는 지금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라디오가 백만 대가 되기까지

라디오 수신기가 얼마나 있었는지를 보면 그 시절이 보입니다.

시점 라디오 보유 대수
1933년 말 32,000여 대
1947년 8월 185,700여 대
1959년 30만 대 돌파
1960년 42만여 대
1961년 말 100만 대 돌파
1970년 250만 대

1947년에 십팔만 대뿐이었는데, 그중 육십팔 퍼센트가 서울과 경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는 라디오 구경하기가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1959년에 국산 라디오가 나오고, 이 년 만에 백만 대를 넘습니다. 정부가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편 것도 이 무렵입니다. 마을에 스피커를 달아 방송을 틀어 주는 이른바 라디오촌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국산화율도 빠르게 올라갑니다. 1967년 27.5퍼센트였던 것이 1971년에는 90퍼센트를 넘습니다.

일요일 밤 아홉 시 십오 분

라디오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것은 연속극입니다.

본격적인 라디오 연속극의 출발은 「청실홍실」이었습니다. 1956년 10월 7일부터 이듬해 4월 28일까지 KBS에서 삼십 부작으로 방송됐습니다. 시간은 일요일 오후 아홉 시 십오 분부터 삼십 분간이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나오고 이듬해에는 최초의 일일연속극이 시작됩니다. 1960년대 중반이 되면 저녁 황금시간대 라디오 채널마다 매시간 연속극을 내보냈고, 한 해에 방송되는 연속극이 백오십 편이 넘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저녁 시간의 주인은 라디오였습니다.

흑백텔레비전, 쌀 스물 몇 가마

이제 텔레비전입니다.

국산 흑백텔레비전 1호는 1966년 8월 1일 금성사가 내놓은 VD-191입니다. 진공관식 십구 인치 탁상형이었고, 첫 생산량이 오백 대였습니다.

값이 문제였습니다. 육만 원대에서 팔만 원대로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때 쌀 한 가마가 이천오백 원쯤이었으니 쌀 스물 몇 가마 값이었습니다. 월평균 소득으로 치면 예닐곱 달치였고, 한 연구자는 "제조업 생산직 근로자의 일 년 수입에 해당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추첨으로 팔았습니다.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당첨되면 다섯 달이나 열 달 월부로 나눠 냈습니다.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던 날

방송국 연표도 정리해 두겠습니다.

방송 개국
HLKZ-TV(대한방송) 1956년 5월 설립, 11월 정규방송. 1961년 폐국
KBS-TV 1961년 12월 31일
TBC-TV(최초 민영) 1964년 12월 7일
MBC-TV 1969년 8월 8일
한국방송공사(KBS) 발족 1973년 3월

KBS가 개국하던 1961년 12월 31일, 전국의 텔레비전 수상기는 만 삼천 대였습니다. 인구 대비 보급률이 0.07퍼센트였습니다. 방송은 시작했는데 볼 사람이 없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공보부가 미제와 일제 수상기 이만 대를 수입해 월부로 팔았습니다. 이것도 추첨이었습니다. 1962년 2월 2차 추첨의 경쟁률이 오 대 일이었고, 접수용지만 이십만 장이 나갔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보급률이 말해 주는 것

이 표가 오늘 글의 핵심입니다. 문화공보부와 KBS의 공식 통계를 정리한 것입니다.

연도 등록대수 세대당 보급률 도시 대 농촌
1961년 13,000 0.03% 100 : 0
1966년 43,634 0.8% 100 : 0
1970년 379,564 6.4% 94.5 : 5.5
1973년 1,282,122 20.7% 86.7 : 13.3
1975년 2,061,072 30.4% 77.3 : 22.7
1977년 3,804,535 55.7% 69.7 : 30.3
1979년 5,696,256 78.5% 63.3 : 36.7

1970년까지도 농촌의 텔레비전은 전체의 5.5퍼센트뿐이었습니다. 1973년 기준으로 도시는 네 가구에 한 대였는데 농촌은 마흔 가구에 한 대였습니다.

그러니 동네 사람이 한집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본 것은 인심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그 동네에 그 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1979년에 이르러 세대당 보급률이 78.5퍼센트가 되는데, 이 무렵 텔레비전 보급률이 전화 가입률을 넘어섭니다. 집에 전화는 없어도 텔레비전은 있는 시대가 된 겁니다.

동네 사람이 한집에 모이던 시절

국가기록원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경제개발이 제일의 목표였던 1960~70년대, 텔레비전이 한 집에 한 대 있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프로레슬링이 텔레비전 중계를 하면 동네 만화가게나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온 동네 사람이 모였다.

그러다 사고도 났습니다. 1964년 5월 20일, 한일전 프로레슬링을 보려고 가정집 이 층에 예순 명 남짓이 올라갔다가 마루가 내려앉았습니다. 열아홉 명이 다쳤습니다.

입장료를 받는 사설 텔레비전 관람소도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종로 등 도심 스물두 곳에 길거리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십일 호 달 착륙 중계 때는 초저녁부터 상가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전파상과 다방마다 인산인해였고, 다음 날 남산 야외음악당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다시 틀었을 때는 십만 명이 몰렸습니다. 당시 신문은 그들을 아폴로 시민이라 불렀습니다.

참고로 김일 선수가 세계챔피언이 된 것은 1967년 4월 29일 장충체육관에서였습니다.

「아씨」와 「여로」, 그리고 서울시경의 안내문

1970년대 초 텔레비전 드라마 두 편이 나라를 뒤집어 놓습니다.

먼저 「아씨」입니다. 1970년 3월 2일부터 1971년 1월 9일까지 동양방송에서 방영됐고 이백오십삼 회까지 갔습니다. 처음에는 백 회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이 드라마와 관련해 남아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서울시경이 방송 전에 화면에 안내문을 내보냈습니다. 문단속을 잘해 도둑을 조심하고, 수도꼭지가 잠겨 있는지 점검한 뒤 시청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드라마 시간에 온 동네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으니 빈집털이가 늘었던 겁니다.

그다음이 「여로」입니다. 1972년 4월 3일부터 12월 29일까지 KBS에서 이백십일 회 방영됐습니다. 태현실과 장욱제가 나온 그 드라마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드라마가 나가는 시간에 영화관 관객이 줄었고 거리에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여로다방, 여로식당이라는 간판이 생겨났습니다. 1972년 중반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백만 대를 넘어선 것과 시기가 겹칩니다.

다만 여기서 정직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여로」 시청률이 70퍼센트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그때는 시청률을 조사하는 체계가 없었습니다. 사후에 나온 추정치입니다. 아쉽지만 정확한 수치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참고로 「여로」는 필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현재 일 회분만 현존합니다.

시청료와 컬러 시대

시청료 이야기도 짧게 하겠습니다.

1963년 1월 1일부터 월 백 원의 텔레비전 시청료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단계적으로 올라 1980년 무렵에는 팔백 원 수준이 됐습니다.

그리고 컬러가 옵니다.

시기 내용
1974년 국내 컬러TV 생산 시작(수출용)
1980년 8월 1일 컬러TV 국내 시판 허용
1980년 12월 1일 KBS 컬러 방송 개시
1981년 1월 프로그램의 80퍼센트 이상 컬러 전환
1981년 4월 컬러TV 시청료 월 2,500원 별도 책정
1984년 12월 흑백TV 시청료 면제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컬러TV는 1974년부터 국내에서 만들고 있었습니다. 다만 정부가 과소비를 조장하고 계층 간 위화감을 준다는 이유로 국내 방영을 막고 있었습니다. 만들어서 수출만 한 겁니다.

그 방침이 바뀐 이유는 경제였습니다. 1970년대에 연평균 사십 퍼센트씩 성장하던 전자산업이 1980년에 13.1퍼센트 마이너스 성장을 합니다. 제2차 석유파동이 겹쳤고, 흑백TV 보급률이 90퍼센트를 넘어 국내 시장이 포화 상태였습니다.

컬러 방송이 시작된 이듬해 전자산업 생산은 33퍼센트 늘었습니다.

전기가 있어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잘 언급되지 않는 조건 하나를 짚겠습니다. 전기입니다.

텔레비전이 아무리 싸져도 전기가 안 들어오는 집에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1965년 농어촌전화촉진법이 만들어지면서 농촌에 전기를 넣는 사업이 본격화됩니다.

전기 보급률은 1964년 12퍼센트에서 1979년 98퍼센트가 됩니다.

1973년 경향신문은 농촌에 텔레비전이 급증한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습니다. 농어민 소득이 늘었고, 농어촌 전화사업이 확장됐고, 중계소가 늘어 볼 수 있는 지역이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앞의 보급률 표에서 농촌 비율이 1970년 5.5퍼센트에서 1979년 36.7퍼센트로 뛰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전깃줄이 먼저 들어가고 그다음에 텔레비전이 들어간 겁니다.

거실로 들어온 세상

돌아보면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959년에 국산 라디오가 처음 나왔고, 1961년에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고, 1966년에 국산 텔레비전이 나왔고, 1980년에 컬러가 됐습니다. 이십 년 남짓입니다.

그 이십 년 사이에 세상 소식을 듣는 방법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전에는 장에 가야 알았고 신문을 봐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안방에 앉아서 달에 사람이 내리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은 그 변화를 한가운데서 겪으신 세대입니다. 이웃집 마루에 앉아 레슬링을 보시던 분, 「여로」 시간에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시던 분, 처음 컬러 화면을 보고 놀라시던 분.

요즘은 손바닥만 한 기계로 다 봅니다. 편해지긴 했는데, 온 동네가 한 화면을 같이 보던 그 시절만큼 재미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출처 및 참고
· 금성 A-501(1959년, 2만 환), 금성 VD-191(1966년): 국가유산청 국가등록문화유산 등록 자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품, 한국경제 2008년 8월 5일자
· 라디오 보유 대수 추이(1933~1961년), 국산화율,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라디오」. 1970년 250만 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문화사』 20권
· 텔레비전 등록대수와 세대당 보급률, 도시·농촌 비율, 1961년 개국 당시 1만 3천 대, 수상기 추첨 판매, 1973년 도시 4가구당 1대·농촌 40가구당 1대: 문화공보부 『문화공보 30년』(1979)과 한국방송공사 『한국방송 60년사』(1987)를 재구성한 통계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발간 백미숙 「한국 텔레비전의 근대적 성격, 1956~1979」(2014)에 수록
· 방송사 개국 연표, 컬러TV 시판 허용(1980년 8월 1일)과 방송 개시(1980년 12월 1일), 시판 지연 배경과 전자산업 수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텔레비전」·「컬러텔레비전 방영」, 국립중앙과학관
· 동네 집단 시청, 1964년 만화가게 2층 붕괴(19명 부상), 김일 세계챔피언(1967년):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프로레슬링」
· 아폴로 11호 중계와 남산 10만 명, 사설 관람소, 길거리 텔레비전 22곳, 「아씨」 방영 전 서울시경 안내문: 백미숙(2014), 원출처 조선일보 1964년 5월 21일자·1969년 7월 22일자
· 「청실홍실」(1956년), 라디오 연속극 연 150여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실홍실」, 국가기록원 「라디오 방송」, 우리역사넷
· 「아씨」(1970~1971년, 253회), 「여로」(1972년, 211회, 1회분만 현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씨」, 백미숙(2014)
· 시청료 1963년 월 100원 도입: 우리역사넷 『한국문화사』 20권
· 농어촌전화촉진법(1965년), 전기 보급률 1964년 12퍼센트에서 1979년 98퍼센트: 국가기록원 「농어촌전화사업」, 한국전력공사 자료
· 1973년 농촌 텔레비전 급증 요인 분석: 경향신문 1973년 1월 12일자, 백미숙(2014) 인용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금성 VD-191의 정확한 가격은 65,310원, 68,000원, 86,000원 세 가지가 매체마다 다르게 인용되며 국가기관 자료에는 가격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 범위로 적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라디오 가격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쌀 2.5~5가마)과 국가기록원(쌀 50가마)의 서술이 크게 어긋납니다. 라디오의 연도별 가구 보급률 백분율 통계는 찾지 못해 대수만 실었습니다. 시청료 금액 변천표는 1963년과 1981년 두 시점만 교차 확인되어 중간 값은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연도별 텔레비전 등록대수도 확보한 공식 통계가 1979년까지라 싣지 못했습니다. 「아씨」 총 회차는 251회·252회·253회가 혼재합니다. 「여로」의 시청률 70퍼센트는 당시 시청률 조사 체계가 없어 사후 추정치이므로 본문에 수치로 쓰지 않았습니다.
통계는 발표 시점 자료이며 이후 갱신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