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네 시부터 서울역 앞에 사람이 모였습니다. 오전 아홉 시에 예매창구가 열리는데, 그 시각 역 광장에는 오천 명이 서 있었고 줄은 용산 쪽으로 이백 미터가 넘게 이어졌습니다.
경찰은 새치기를 막으려고 예매객들을 바닥에 앉혀 일어서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장대를 머리 위로 휘두르며 끼어드는 사람을 곤봉으로 쳤습니다.
이것은 회고가 아니라 국가기록원이 기록한 1976년 추석의 서울역 풍경입니다.
기차표 한 장을 얻으려고
그때 서울역 매표창구는 스물네 개였습니다. 스물네 개 창구로 온 나라의 귀성객을 감당해야 했으니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서울역 근처 여관은 예매 전날 밤 만원이었습니다. 여관값이 아까운 사람은 대합실 바닥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리고 암표상이 극성이었습니다.
표를 손에 넣지 못하면 어떻게 했을까요. 입석으로 탔습니다. 화장실 앞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밤새 갔고, 짐칸에 올라가 누운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가야 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부모 얼굴을 보는 날이었으니까요.
예매 방식이 바뀐 것은 한참 뒤입니다. 1981년에 서울역 등에서 새마을호 승차권 전산 발매가 시작됐고, 인터넷 예매는 2000년에야 열렸습니다. 그전까지는 몸으로 줄을 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들 떠났나 — 숫자로 본 이촌향도
귀성 전쟁이 왜 벌어졌는지는 인구 통계를 보면 한눈에 들어옵니다.
| 연도 | 농가 인구 |
|---|---|
| 1970년 | 1,442만 명 |
| 1980년 | 1,083만 명 |
| 1990년 | 666만 명 |
1970년에는 전체 인구 3,144만 명 가운데 45.9퍼센트가 농가 인구였습니다.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농촌에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무 해 만에 그 수가 절반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가 하면 서울이었습니다.
| 연도 | 서울 인구 |
|---|---|
| 1968년 | 400만 명 돌파 |
| 1970년 | 500만 명 돌파 |
| 1972년 | 600만 명 돌파 |
| 1976년 | 700만 명 돌파 |
| 1979년 | 800만 명 돌파 |
십일 년 사이에 서울 인구가 두 배가 됐습니다. 매년 이십만에서 육십만 명씩 늘었고, 그 증가분은 아이가 태어나서가 아니라 사람이 옮겨 와서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명절이 되면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이 대이동에 "한때 우리나라 전 인구의 오분의 일이 참여했을 때도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길이 생기다 — 경부고속도로
기차가 안 되면 차로 가야 하는데, 길이 있어야 했습니다.
1968년 2월 1일 착공, 1970년 7월 7일 완공. 이 년 오 개월 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킬로미터가 뚫렸습니다. 개통 당시에는 전 구간이 왕복 사차로였습니다.
| 항목 | 수치 |
|---|---|
| 총연장 | 428킬로미터 |
| 공사 기간 | 1968년 2월 ~ 1970년 7월 |
| 총건설비 | 429억 7,300만 원 |
| 동원 인력 | 연인원 약 900만 명 |
| 교량·터널 | 교량 346개소, 터널 6개소 |
| 건설 중 희생자 | 77명 |
표의 마지막 줄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길을 놓다가 일흔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명절마다 오르내리는 그 길입니다.
국가기록원은 개통 뒤 "서울에서 부산까지 불과 네 시간대"가 되었고, 이때부터 일일생활권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차와 버스, 그 시절의 이름들
열차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1969년 2월에 최상급 열차 관광호가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대전, 동대구, 부산 네 역만 서고 다섯 시간 사십오 분이 걸렸습니다. 이 열차가 1974년 8월 15일 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 아래로 1977년에 우등이 생겼다가 1984년 1월 1일 무궁화호가 되었고, 특급이 통일호, 완행이 비둘기호가 되면서 네 등급 체계가 자리 잡습니다. 새마을·무궁화·통일·비둘기. 이 네 이름을 다 기억하신다면 그 시절을 지나오신 분입니다.
고속버스도 이 무렵 시작됩니다. 국내 최초 고속버스는 1969년 4월 12일 서울에서 인천까지 다닌 노선이었습니다. 버스 스무 대로 시작했고, 국도로 한 시간 이십 분 걸리던 길을 사십 분으로 줄였습니다.
그해 가을 경부고속도로가 부분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천안, 청주, 대전으로 노선이 늘어납니다.
서울 강남 반포에 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선 것은 1976년 9월 1일입니다. 그전까지 고속버스는 서울역과 동대문 등 도심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명절에 표를 사러 어디로 가야 하는지부터 헷갈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연휴가 사흘이 되기까지
지금은 명절 연휴가 사흘인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 시기 | 제도 |
|---|---|
| 1985년 | '민속의 날' 지정. 음력설 하루 공휴일 |
| 1986년 9월 | 추석 다음날을 공휴일로 추가(추석 2일) |
| 1989년 2월 | '민속의 날'을 '설날'로 개칭. 설날·추석 각 3일 연휴 확립 |
| 1991년 | 양력설 휴일 3일 → 2일 |
| 1999년 | 양력설 휴일 1일로 축소 |
음력설이 하루 공휴일이 된 것이 1985년입니다. 그 전에는 음력설에 쉬지 못했습니다. 1981년 조사에서 국민의 81.8퍼센트가 음력설을 지낸다고 답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1970년대 귀성은 하루 이틀 안에 다녀와야 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국가기록원도 1989년 연휴가 사흘로 늘면서 민족대이동이 본격화됐다고 적고 있습니다.
명절 선물, 설탕과 조미료의 시대
귀성 보따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60년대의 최고급 선물은 설탕, 밀가루, 조미료였습니다. 흰 것 세 가지라 해서 삼백(三白)이라 불렀습니다. 지금 보면 소박하지만 그때는 귀했습니다. 1965년 신세계백화점이 추석 선물 카탈로그를 처음 내놓습니다.
1970년대가 되면 여기에 커피 세트가 끼어듭니다. 백화점 선물 순위에서 설탕과 조미료에 이어 삼 위에 올랐습니다. 필요한 것에서 좋아하는 것으로 선물이 바뀌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1980년대에는 갈비와 정육, 참치 캔이 등장하고, 1990년대에는 상품권이 나옵니다.
그 이전 세대의 비극 하나
귀성길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일은 짚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1970년대는 아니고 그보다 앞선 시기입니다.
1960년 1월 26일 밤 열한 시경, 설을 이틀 앞둔 서울역에서 압사 사고가 났습니다. 목포행 호남선 완행열차를 타려던 사람들이 삼 번 계단에서 한꺼번에 넘어졌습니다.
서른한 명이 숨지고 마흔한 명이 다쳤습니다.
평소 그 승강장의 하루 이용객이 천삼백 명 남짓이었는데 그날은 세 배인 삼천구백여 명이 몰렸습니다. 계단은 빙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망자 대부분이 무거운 짐을 든 부녀자였습니다.
고향에 가져갈 짐을 이고 지고 계단을 오르다가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귀성길
그러면 지금은 어떨까요.
| 항목 | 2025년 추석 |
|---|---|
| 특별교통대책 기간 | 10월 2일 ~ 12일(11일간) |
| 총 이동인원 | 3,218만 명 |
| 일평균 이동 | 775만 명 |
| 승용차 이용 비율 | 84.5퍼센트 |
| 서울에서 부산(최대 소요) | 8시간 10분 |
여전히 여덟 시간이 걸립니다. 개통 당시 네 시간대라던 그 길이 명절에는 두 배가 됩니다.
대신 열차는 빨라졌습니다. 2004년 4월 1일 KTX가 개통하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 사십 분이 됐습니다. 1969년 관광호의 다섯 시간 사십오 분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입니다.
표를 사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2020년 추석부터 현장 예매가 중단됐고, 지금은 전부 비대면입니다. 새벽 네 시에 서울역 앞에 서 있을 일이 없어졌습니다.
다만 대신 아침 여섯 시에 휴대전화를 붙들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기도 합니다. 방법이 바뀌었을 뿐, 고향에 가려는 마음은 그대로니까요.
그 길을 지나온 분들께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 가운데는 그 시절 서울역 대합실에서 밤을 새우신 분, 입석으로 열두 시간을 서서 가신 분, 아이를 업고 짐을 이고 계단을 오르신 분이 계실 겁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다들 그렇게 다녔으니까요. 지금 돌아보면 그 고생을 왜 했나 싶기도 한데, 그 걸음의 끝에 부모가 계셨습니다.
올 추석에는 조금 편하게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오래 걸리더라도 서두르지 마시고요. 그때 그 계단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늦게 가는 것이 못 가는 것보다 낫습니다.
출처 및 참고
· 1976년 추석 서울역 예매 풍경(창구 24개, 새벽 4시, 5천 명, 용산 방향 200미터, 곤봉), 전 인구 5분의 1 대이동, 1989년 연휴 3일 확립, 음력설 81.8퍼센트, 연휴 제도 변천: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생활 > 명절(설, 추석)」
· 경부고속도로 총연장 428킬로미터, 건설비, 공사 규모, 개통 후 네 시간대와 일일생활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부고속도로」 및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경제·산업 >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 희생자 77명은 국가기록원 기준
· 농가 인구 추이: 통계청 「농림어업조사」
· 서울 인구 추이: 서울연구원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인구개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기반
· 연휴 제도 개정: 국가법령정보센터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개정 이유
· 2025년 추석 이동인원과 소요시간: 국토교통부 「2025 추석 특별교통대책」
· KTX 개통(2004년 4월 1일)과 소요시간: 공개 자료
· 1960년 서울역 압사 사고: 여러 매체가 일치하는 기록이나 정부 공문서 원본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명절 선물 변천: 경향신문(2014년), 한국일보(2022년) 등 언론 보도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1970~80년대 연도별 귀성객 수 통계는 온라인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국가기록원에 「1987년도 추석절 귀성객 특별수송대책」 등 문서가 소장되어 있으나 본문 수치는 공개되어 있지 않아, 이 글에는 연도별 귀성객 수를 싣지 않았습니다. 1970~80년대 명절 정체 시 실제 소요시간도 도로공사나 국토부의 공식 기록을 찾지 못해 쓰지 않았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전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시간이 걸렸다는 서술도 널리 인용되지만 국가기록원과 백과사전 원문에는 없습니다. 열차별 소요시간은 철도청 공식 시각표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국토교통부의 명절 총 이동인원 집계는 1990년대 이후 체계에서 시작된 것이라 1970년대 수치와 직접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통계는 발표 시점 자료이며 이후 갱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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