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의 한 번이 이 년 십칠 일 걸렸습니다.
1951년 7월 10일에 시작해 1953년 7월 27일에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이 년 동안 전쟁이 멈춰 있던 것이 아닙니다. 회담장에서는 말싸움이, 전선에서는 고지 쟁탈전이 동시에 벌어졌습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짚어 보겠습니다.
회담은 어떻게 시작됐나
먼저 시작 경위입니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가 라디오 방송에서 휴전을 제의했습니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였고, 7월 8일 개성에서 연락장교회의로 절차를 정한 뒤 7월 10일 개성 내봉장에서 본회의가 열렸습니다.
첫날은 상견례였고, 실제 회담은 7월 11일부터였습니다.
구분내용
| 개시 | 1951년 7월 10일, 개성 내봉장 |
| 대표 | 양측 각 5명 |
| 유엔군 수석대표 | 조이 해군 중장 (이후 해리슨 육군 중장) |
| 공산군 수석대표 | 남일 (북한군 총참모장) |
| 종료 | 1953년 7월 27일 |
| 총 기간 | 2년 17일 |
제목의 2년 17일이 여기서 나옵니다. 참고로 전쟁 전체는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1개월 2일이었습니다.
765번의 회의
이 년 동안 몇 번이나 만났을까요.
회의 종류횟수
| 본회담 | 159회 |
| 분과위원회 | 179회 |
| 참모장교회담 | 188회 |
| 연락장교회담 | 238회 |
| 합계 | 765회 |
이 년 동안 칠백육십다섯 번을 만났습니다. 사흘에 세 번꼴입니다. 그런데도 합의가 안 됐습니다.
장소도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개성에서 열렸는데, 1951년 8월 공산군 측이 유엔군 항공기가 회담장을 폭격했다고 주장하며 회담을 일방적으로 중단했습니다. 이후 중립지대 관리 문제로 1951년 10월 25일 판문점에서 재개했습니다.
회담이 완전히 멈춘 적도 여러 번입니다.
- 1952년 2월 27일부터 약 두 달 중단 (포로 송환 문제)
- 1952년 10월 8일 무기휴회 → 1953년 4월 16일 재개 (여섯 달 만)
-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다시 중단
무엇 때문에 이 년이 걸렸나
쟁점은 크게 둘이었습니다.
첫째, 군사분계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
유엔군은 지금 서로 맞닿아 있는 선으로 하자고 했고, 공산군은 삼팔선으로 되돌리자고 했습니다. 1951년 7월 17일부터 협상을 시작해 11월 27일에야 유엔군 안대로 합의됐습니다. 접촉선을 분계선으로 하고 남북으로 각 2킬로미터씩, 모두 4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를 두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서운 단서가 붙었습니다. 삼십 일 안에 휴전협정에 조인해야만 이 선이 유효하고, 그러지 못하면 조인 당시의 접촉선으로 다시 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항 때문에 협정을 맺을 때까지 양쪽 모두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계속 싸웠습니다.
둘째, 포로를 어떻게 돌려보낼 것인가.
유엔군은 포로 본인이 갈 곳을 고르게 하자고 했고, 공산군은 무조건 본국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1952년 4월 유엔군사령부가 조사해 보니, 민간인 억류자를 포함한 공산군 포로 약 17만 명 가운데 10만 명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공산군 측이 강하게 반대했고, 이 문제로만 일 년 반이 지나갔습니다.
회담장에서 말싸움, 전선에서 혈전
이 글에서 가장 무거운 대목입니다.
양측은 처음부터 최종 합의가 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 전제로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회담이 이 년 동안 이어지는 내내 전선에서는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이 시기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회담 기간에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심리적 주도권을 잡기 위한 소모적 전투만 반복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때 이름이 남은 전투들입니다.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펀치볼, 백마고지, 저격능선, 금성.
백마고지 전투를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항목내용
| 시기 | 1952년 10월 6일~15일 (열흘) |
| 장소 | 강원 철원 |
| 쟁탈전 | 12차례, 고지 주인 7번 바뀜 |
| 국군 제9사단 사상자 | 약 3,500명 |
| 중공군 제38군 피해 | 약 1만 명 |
열흘 동안 고지 하나를 두고 일만 삼천오백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 열흘 사이에도 판문점에서는 회담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회담 이 년간의 총 사상자를 합산한 공식 수치는 저도 찾지 못했습니다. 개별 전투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열 시
끝은 이렇게 왔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열 시, 판문점에서 열린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육군 중장과 공산군 측 남일이 협정서에 서명했습니다. 이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김일성, 펑더화이가 각자 후방 사령부에서 서명했습니다.
협정은 5개조 63개항이었고, 효력은 같은 날 밤 열 시부터였습니다. 서명하고 열두 시간 뒤에 총성이 멎은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백과사전은 "최후까지 휴전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끝내 본 휴전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고, 국가기록원은 "한국 정부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앞의 일도 있었습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해 회담을 막으려 했습니다. 석방 인원은 자료에 따라 2만 6천 명 또는 2만 7천여 명입니다. 결국 휴전을 묵인하는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군사·경제 원조, 한국군 증강을 약속받았습니다.
이 년 십칠 일이 남긴 것
회담이 남긴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항목결과
| 군사분계선 | 접촉선 기준, 비무장지대 4킬로미터 |
| 포로 송환 | 본인 의사 존중 방식으로 타결 |
| 병력 교체 | 월 3만 5천 명 한도 |
| 중립국감시위원회 |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스웨덴·스위스 4개국 |
| 정치회담 | 3개월 내 소집 건의 |
그리고 그 선이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칠십삼 년째입니다.
그 이 년을 기억하는 분들께
휴전회담이라고 하면 어른들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장면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이 년은 회담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 가운데는 그 무렵 태어나셨거나 어린 시절을 보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아버지나 삼촌이 그 고지 어딘가에 계셨던 분도 있을 것이고요.
회담이 하루 빨리 끝났다면 살았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그건 아무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칠백육십다섯 번을 만나고도 이 년이 걸렸다는 사실만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이 년 뒤에 그어진 선을 우리는 아직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출처 및 참고
· 회담 개시 경위와 날짜(1951년 7월 10일 개성 내봉장), 양측 대표, 2년 17일, 판문점 이전, 중단과 재개, 군사분계선 협상과 1951년 11월 27일 합의, 30일 단서 조항, 포로 송환 쟁점과 1952년 4월 조사 결과, 병력 교체·중립국감시위원회·정치회담 합의, 1953년 7월 27일 제159차 본회의 서명, 대한민국 미서명, 반공포로 석방: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휴전회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기반)
· 회담 기간 중 전투 지속과 소모적 고지전 서술, 5개조 63개항, 효력 발생 시각: 국가기록원 「6·25전쟁 개요」 및 「한국과 유엔」
· 총 765회(본회담 159회 등):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정전협정의 체결」
· 백마고지 전투 수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마고지 전투」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회담 이 년간의 총 사상자를 합산한 공식 수치는 어느 기관 자료에서도 확인하지 못해 개별 전투 수치만 실었습니다. 회의 총 765회는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로 확인했으나 원문 페이지를 직접 열람하지는 못했습니다. 반공포로 석방 인원은 국가기록원 2만 6천 명과 백과사전 2만 7천여 명으로 갈립니다. 서명 시각은 오전 열 시까지만 1차 확인되며, 분 단위 기록은 2차 자료에만 있습니다. 미국 육군 일부 자료는 회담 개시일을 1951년 7월 21일로 적고 있으나 한국 측 1차 자료는 모두 7월 10일입니다.
'한국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구로공단의 여공들, 산업화의 그늘과 빛 (0) | 2026.08.20 |
|---|---|
| 광복 그 여름, 우리 부모님이 겪은 '해방 공간'의 진짜 풍경 (0) | 2026.08.15 |
| 1987년 7월 9일, 서울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 스물두 살 청년의 마지막 길 (0) | 2026.07.10 |
| "피, 오, 엥, 챙!" 온 국민이 밤을 새운 그날,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이야기 (2011년 7월 6일) (1) | 2026.07.06 |
| 76년 전 오늘, 죽미령 언덕에서 있었던 일 - 스미스 특임부대 이야기 (0) | 2026.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