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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광복 그 여름, 우리 부모님이 겪은 '해방 공간'의 진짜 풍경

by 인생의 쉼표 2026. 8. 15.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삼 년이 어땠는지는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만세를 부르고 나서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부터 살아야 했습니다. 그 살림이 어땠는지를 숫자로 들여다보려 합니다.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의 부모님이 지나온 시간입니다.

물가가 이백 배가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닥친 것은 물가였습니다.

일제는 패망 직전 예금 인출과 일본군 임금, 퇴직금, 귀국비를 대느라 조선은행권을 마구 찍었습니다. 미군정도 재정 적자를 메우려고 계속 찍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49억 7,500만 원이던 화폐 발행고가 그해 연말 87억 6,300만 원이 되었습니다. 넉 달 만에 거의 두 배입니다. 1946년과 1947년에도 해마다 거의 두 배씩 늘었습니다.

그 결과가 이 표입니다. 1936년을 100으로 놓은 지수입니다.

구분1944년1945년1946년1947년1948년

소매물가지수 247 5,746 22,300 40,900 62,900
노임(임금)지수 264 2,725 7,119 14,843 20,334

1936년과 견주면 1946년 물가는 223배, 임금은 71배였습니다. 물가가 임금보다 세 배 빨리 뛴 겁니다.

월급을 받아도 살 것이 없었다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비누는 세 사람에 하나

물건 자체가 없었습니다. 미군정이 1946년 7월부터 1947년 12월까지 열여덟 달 동안 공급한 공산품 양이 이렇습니다.

물품공급량

면포 1인당 1마(약 90센티미터)
양말 8인당 1켤레
고무신 8인당 1켤레
운동화 25인당 1켤레
비누 3인당 1개

열여덟 달 동안 여덟 사람에 고무신 한 켤레였습니다. 스물다섯 사람에 운동화 한 켤레였고요.

공장이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한의 다섯 명 이상 공장이 1944년 6월 9,323개소에서 1946년 11월 5,249개소로 줄었고, 종업원은 30만 520명에서 12만 2,159명으로 59퍼센트가 사라졌습니다.

1939년과 견준 1946년 생산 감소율은 식료품 82.9퍼센트, 화학 76.2퍼센트, 기계기구 60.5퍼센트, 방직 60.3퍼센트였습니다. 대부분의 공장이 멈춰 선 겁니다.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1946년 말 실업자가 105만 937명이었고, 직업을 알 수 없는 인구까지 넣으면 실제로는 백오십만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사람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거기에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시점남한 인구증가

1944년 5월 15,879,110명 -
1945년 말 16,873,277명 +99만
1946년 8월 19,369,270명 +250만
1949년 5월 20,188,641명 -

다섯 해 사이에 431만 명, 27퍼센트가 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가 아니라 사람이 들어와서입니다. 특히 1945년 8월부터 1946년 8월까지 한 해에 이백오십만 명이 늘었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하면 이렇습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말까지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가 122만 명(일본에서 111만 8천 명, 중국 등에서 10만 2천 명), 북에서 내려온 사람이 96만 9천 명이었습니다. 합치면 약 220만 명입니다.

집도 일자리도 없는 곳에 이백만 명이 더 들어온 겁니다.

쌀을 걷어 갔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먹는 것이었습니다.

미군정은 처음에 쌀을 자유롭게 사고팔게 했습니다. 결과는 매점매석이었습니다. 쌀값이 폭등하고 시장에서 쌀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러자 1946년 2월 미곡수집령을 내려 강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보리까지 확대했습니다. 시세에 한참 못 미치는 값으로 할당해 걷어 갔습니다.

농민들에게는 이것이 일제 말 공출과 똑같아 보였습니다. 나라를 되찾았는데 쌀을 걷어 가는 것은 그대로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걷어도 수집 실적이 나쁘다 보니 도시 배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농민도 도시민도 불만이 쌓였습니다.

당시 남한 사람 한 명이 한 해에 먹을 수 있던 식량은 이랬습니다.

연도1인당 식량(쌀+잡곡)

일제하 1930~37년 평균 1.22석
1945년 1.17석
1946년 1.01석
1947년 1.02석

일제강점기보다 오히려 줄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의 한 배경에 이 식량 문제가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쌀을 달라며 수천 명이 도청과 부청으로 몰려간 일이 그것입니다.

콜레라가 돌았습니다

1946년에는 전염병까지 왔습니다.

그해 5월 초, 중국 남부에서 귀환하는 동포 3,150명을 태운 배가 부산에 들어오던 중 선상에서 콜레라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남한에서만 환자 15,644명, 사망 10,181명이었습니다. 걸린 사람 셋 중 둘이 죽은 셈입니다.

학계는 이 유행을 일제강점기 대유행을 제외하면 20세기 한반도 최대 규모의 콜레라로 봅니다.

그래도 글을 가르쳤습니다

이 와중에 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글을 가르친 것입니다.

해방 당시 열두 살 이상 인구의 약 78퍼센트가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미군정은 성인교육위원회를 만들고 국문강습소를 열었으며, 1946년에는 공민학교 설치령을 냈습니다. 조선어학회와 민간단체가 전국에서 한글 강습회를 열었습니다.

1946년 1월에는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 삼팔선 이남 4만여 부락에서 강습회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을마다 한글을 가르친 겁니다.

그 결과 1948년 정부 수립 무렵 문맹률이 41.3퍼센트까지 떨어졌다고 국가기록원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가가 이백 배가 되고 여덟 사람에 고무신 한 켤레인 나라에서 마을마다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그 강습소에서 글을 배우신 분들이 지금 여든, 아흔이 되셨습니다.

남의 재산이 우리 재산이 되기까지

일본인이 두고 간 재산은 적산이라 하여 미군정이 접수했습니다.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항목규모

귀속농지 약 30만 정보 (남한 경지의 약 14퍼센트)
귀속 사업체 3,551개 (제조업체 2,354개 = 남한 제조업의 66.3퍼센트)
총 가치 당시 우리나라 총 자산가치의 약 80퍼센트로 추정

나라 재산의 팔 할이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뀐 겁니다.

귀속농지는 소작인에게 우선 넘겼는데, 연간 생산량의 20퍼센트를 15년간 현물로 나눠 내는 조건이었습니다. 미군정 기간에 약 75퍼센트가 넘어갔고 1952년 2월까지 91.4퍼센트가 완료됐습니다.

백과사전은 이 불하가 값이 너무 싸게 매겨진 데다 물가까지 급등해 사실상 무상에 가까웠고, 결과적으로 큰 특혜가 되어 부정과 정경유착을 낳았다고 평가합니다. 다만 귀속농지 분배가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의 단서를 마련했다는 점도 함께 적고 있습니다.

삼팔선이 국경이 되기까지

마지막으로 삼팔선입니다.

삼팔선이 언제 막혔느냐는 질문에는 하나의 답이 없습니다.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온 뒤 통제가 시작됐고, 남북 우편물 교환은 1946년 3월부터 1947년 초까지 이 주에 한 번꼴로 이어지다 끊겼습니다. 그리고 1947년 4월 미군정이 월경자를 모두 체포하기로 방침을 세웁니다.

학계는 삼팔선 봉쇄가 본격화된 1946년을 분단사의 기점으로 봅니다. 군사 관할선으로 그어진 선이 이 년 사이에 국경이 된 것입니다.

삼 년의 연표

시기일

1945년 8월 15일 광복
1945년 9월 미군정 통치 시작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발표
1946년 2월 미곡수집령
1946년 5월~ 콜레라 대유행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 공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 삼 년을 지나온 분들에게

광복은 기쁜 날로만 기억됩니다. 그런데 그 기쁨 뒤의 삼 년은 이랬습니다. 물가가 이백 배가 되고, 여덟 사람이 고무신 한 켤레를 나누고, 콜레라로 만 명이 죽고, 쌀을 걷어 가는 것은 그대로였습니다.

그 삼 년을 견딘 사람들이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의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그분들 중 상당수가 그 어려운 시절에 마을 강습소에서 글자를 배웠습니다.

광복절에는 만세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도 맞습니다. 다만 그다음 삼 년을 어떻게 버텼는지도 한 번쯤 이야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견딘 것도 해낸 것이니까요.


출처 및 참고
· 화폐 발행고, 물가·임금 지수, 공산품 공급량, 공장 수와 종업원 감소, 실업자 수, 인구 증가와 귀환동포·월남자 통계, 1인당 식량, 미곡수집령과 대구 10월 항쟁의 배경: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원자료 통계청 『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사회상』 1993)
· 1946년 콜레라 환자 15,644명·사망 10,181명, 문맹률 78퍼센트에서 41.3퍼센트, 1946년 1월 4만여 부락 강습회 결정: 국가기록원 주제설명
· 귀속재산 규모와 불하 조건·평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귀속재산불하」 (원자료 조선은행 조사부 『조선경제연보』 1948)
· 삼팔선 봉쇄 과정: 관련 학술 연구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미소군정기」
확인하지 못한 것 — 해방 직후 쌀값이 몇 배로 뛰었는지 품목별 배수는 1차 출처에서 확인하지 못해 물가지수로 대신했습니다. 해방 후 학교 수와 취학률의 연도별 통계, 대구 10월 사건의 전체 인명피해 규모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귀환동포 규모는 통계청 기준 약 220만 명과 조선은행 조사부 기준 약 238만 명으로 집계 기간이 달라 차이가 납니다. 콜레라 통계와 문맹률 수치는 국가기록원 페이지 본문을 직접 열람하지 못해 여러 자료가 일치하는 값을 실었습니다. 삼팔선 차단 시점은 1945년 8월설, 1946년설, 1947년설이 있어 단일 날짜를 특정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