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7월 9일, 서울 시내가 사람으로 덮였습니다.
스물한 살 대학생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를 보내려고 그날 서울에 백만 명, 광주에 오십만 명이 나왔습니다.
그해 6월 9일, 연세대 정문 앞
이한열은 1966년 8월 29일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198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중학교 이 학년 때 오일팔을 목격한 것이 그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계기였다고 합니다. 만화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던 학생이었습니다.
1987년 6월 9일, 이튿날 열릴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출정 결의대회가 열렸습니다. 교문 앞 시위 도중 그는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후두부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스물여섯 날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다가 7월 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 스무 살, 대학 이 학년이었습니다.
그해 1월부터 6월까지
그 여섯 달의 흐름을 짚어야 7월 9일이 이해됩니다.
날짜일
| 1월 14일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 4월 13일 | 호헌조치 — 임기 내 개헌 거부 선언 |
| 5월 18일 | 박종철 사건 은폐·조작 폭로 |
| 5월 27일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
| 6월 9일 | 이한열 최루탄 피격 |
| 6월 10일 | 6·10 국민대회 |
| 6월 10~15일 | 명동성당 농성 (닷새) |
| 6월 18일 | 최루탄추방대회 |
| 6월 26일 | 국민평화대행진 |
| 6월 29일 | 6·29 선언 |
| 7월 5일 | 이한열 사망 |
| 7월 9일 | 민주국민장 |
6월 10일, 스물두 개 도시
6월 10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숫자로 보겠습니다.
항목수치
| 참여 지역 | 전국 22개 도시 |
| 참여 인원 | 24만여 명 |
| 동원 경찰 | 160개 중대, 2만 2,000여 명 |
| 폐쇄된 지하철역 | 11개 역 |
서울, 부산, 마산, 대구, 포항, 울산, 안동, 경주, 광주, 전주, 대전, 청주, 천안, 춘천, 목포, 군산, 인천 등 스물두 개 도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날 오후 여섯 시, 국기하강식에 맞춰 애국가가 울렸고 분단 마흔두 해를 상징해 종을 마흔두 번 쳤습니다. 차들이 경적을 울렸습니다. 상인들은 쫓기는 학생을 가게에 숨겨 주고 셔터를 내린 뒤 음료수를 건넸습니다.
스무 날 동안 하루 백 번
6월 10일 이후 스무 날 동안의 규모입니다.
항목수치
| 일평균 시위 | 하루 100회 이상 |
|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 | 전국 100만 명 이상 |
|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 | 전국 100만 명 이상, 37~38개 시·군 |
| 참가 연인원(추산) | 400만~500만 명 |
| 사용된 최루탄 | 67만 발 이상 |
마지막 줄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스무 날 남짓에 최루탄 육십칠만 발입니다. 하루 삼만 발 넘게 쏜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6·29 선언이 나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나니 경찰 병력이 분산돼 진압에 한계가 왔고, 최루탄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이듬해 서울올림픽을 앞둔 국제사회의 시선, 군을 동원하면 1980년 광주가 되풀이된다는 부담이 겹쳤습니다.
6·29 선언 여덟 가지
1987년 6월 29일 발표된 선언은 여덟 항목이었습니다.
- 여야 합의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 이양
-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대통령 선거법 개정
- 김대중 등의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 개헌안의 기본권 강화 조항 보완
- 언론자유 창달
- 지방자치·교육자치 실시, 대학 자율화
- 정당활동 보장
- 사회정화 조치
첫 항목이 핵심이었습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다는 것.
7월 9일, 백육십만 명
그리고 7월 9일이 왔습니다.
장례는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운구 행렬은 연세대 본관에서 출발해 신촌 로터리, 서울시청, 광화문을 지나 광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됐습니다.
지역추모 인파
| 서울 | 약 100만 명 |
| 광주 | 약 50만 명 |
| 전국 합계 | 약 160만 명 |
스물한 살 학생 하나를 보내는 데 백육십만 명이 거리에 나왔습니다.
그해 12월
그 뒤의 일도 적어 두겠습니다.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찬성 93.1퍼센트로 개헌안이 통과됐고, 10월 29일 공포됐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헌법입니다.
그리고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후보득표득표율
| 노태우 | 8,282,738 | 36.6% |
| 김영삼 | 6,337,581 | 28.0% |
| 김대중 | 6,113,375 | 27.1% |
| 김종필 | 1,823,067 | 8.1% |
결과를 두고 그때도 지금도 말이 많습니다. 다만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았다는 사실만은 그해에 처음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십육 년 만이었습니다.
남은 사람들
이한열의 이름은 여러 곳에 남았습니다.
시기내용
| 1988년 9월 | 연세대에 추모비와 추모 동산 조성 |
| 1992년 2월 | 연세대 명예학사 학위 추서 |
| 2005년 | 서울 신촌에 이한열기념관 개관 |
| 2016년 6월 9일 | 연세대 정문에 추모 동판 설치 |
그리고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배은심 여사는 1998년부터 사백스물두 날 동안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했습니다.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2022년 1월 9일 광주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떠난 지 서른다섯 해 만이었습니다.
그 여름을 지나온 분들께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은 1987년에 서른, 마흔이셨을 겁니다. 직장에 다니고 아이를 키우던 나이입니다.
그해 유월에 퇴근길에 경적을 울리셨을 수도 있고, 최루탄 연기 속을 지나 집에 오셨을 수도 있고, 그냥 텔레비전으로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해 여름을 몸으로 겪으신 세대입니다.
7월 9일의 백육십만 명 가운데 한 분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물한 살에 멈춘 사람이 있었고, 그를 보내려고 백육십만 명이 거리에 섰습니다. 그해 십이월에 우리는 대통령을 직접 뽑았습니다. 그 사이의 인과를 어떻게 볼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순서만큼은 기록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출처 및 참고
· 이한열의 생몰과 피격·사망 경위, 7월 9일 민주국민장과 추모 인파(서울 100만·광주 50만·전국 160만), 국립5·18민주묘지 안장, 추모 연혁(1988년 추모비, 1992년 명예학사, 2005년 기념관, 2016년 추모 동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한열」
· 6월항쟁 전개, 하루 100회 이상 시위, 6·18과 6·26 각 100만 명, 6월 26일 37~38개 시·군, 참가 연인원 400만~500만 명 추산, 최루탄 67만 발 이상, 6·29 선언이 나온 배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월항쟁」
· 6·10 국민대회 22개 도시 24만여 명, 경찰 160개 중대 2만 2천여 명, 지하철 11개역 폐쇄, 종 42번 타종과 상인들의 일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6·10항쟁」
· 6·29 선언 8개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29민주화선언」,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료
·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 찬성 93.1퍼센트, 12월 16일 제13대 대선 결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 배은심 여사의 422일 농성과 2022년 1월 9일 별세: 언론 보도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장례식 인파는 백과사전 「이한열」이 전국 160만 명, 「6월항쟁」이 서울 노제 100만 명으로 적고 있어 집계 범위가 다릅니다. 본문에는 두 수치를 함께 실었습니다. 6·10 대회 연행자 수는 어느 1차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쓰지 않았습니다. 참가 연인원 400만~500만 명은 백과사전이 추산임을 명시한 수치입니다. 배은심 여사의 422일 농성은 언론 표기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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