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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76년 전 오늘, 죽미령 언덕에서 있었던 일 - 스미스 특임부대 이야기

by 인생의 쉼표 2026. 7. 5.

1950년 7월 5일 아침, 오산 북쪽 죽미령 고개에서 미군 사백여 명이 북한군 전차를 막아섰습니다.

여섯 시간 십오 분을 버텼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나흘 만에 온 부대

이 부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일시일

1950년 6월 30일 밤 10시 45분 일본 주둔 미 24사단에 출동 경보
7월 1일 일본 이타즈케 공항에서 공수, 부산 도착
7월 2일 대전
7월 4일 죽미령 진지 점령
7월 5일 전투

경보에서 전투까지 닷새였습니다. 지휘관 이름을 따서 스미스 특임부대라 불렀습니다.

병력은 이랬습니다.

구성규모

보병 406명 (2개 소총중대)
포병 105밀리 곡사포 6문
총계 약 540명

상대는 전차 서른세 대

이들이 맞선 상대는 북한군 정예 제4사단과 제107전차연대였습니다.

전차 서른세 대, 보병 약 사천 명. 전차는 소련제 T-34였습니다.

오백사십 명이 사천 명과 전차 서른세 대를 막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섯 시간 십오 분

그날 시간표입니다.

시각일

오전 7시 30분경 수원 방면에서 북한군 전차 최초 관측
오전 8시 16분 첫 포격 — 유엔 지상군 최초의 전투
오전 11시경 북한군 보병 공격 개시
오후 2시 30분 철수 명령

여섯 시간 십오 분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무력했나

이 대목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미군이 못 싸운 것이 아니라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 대전차 무기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군의 2.36인치 바주카 로켓은 T-34 전면 장갑을 뚫지 못했습니다. 미 육군 공식 기록에 이런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한 소위가 4.5미터 거리에서 스물두 발을 쐈는데도 전차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둘째, 대전차 포탄이 여섯 발뿐이었습니다.

105밀리 곡사포 포탄이 천이백 발 있었는데, 그중 전차를 뚫을 수 있는 성형작약탄은 단 여섯 발이었습니다. 이 여섯 발을 쓴 전진 배치 곡사포 한 문이 전차 두 대를 부수고 자신도 파괴됐습니다.

셋째, 대전차 지뢰가 한 발도 없었습니다.

전투 후 지휘관들은 지뢰 몇 발만 제대로 깔았어도 전차 종대 전체를 막을 수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국 전역에 대전차 지뢰가 한 발도 없었습니다.

넷째, 실전 경험자가 여섯 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장교의 삼분의 일, 부사관의 절반만 2차대전 참전자였고, 그마저 실전을 겪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전체로 보면 여섯 명 중 한 명만 실전 경험이 있었습니다.

다섯째, 부대 자체가 반쪽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국방비를 크게 줄인 상태였습니다. 극동 주둔 미군 보병사단은 화력의 62퍼센트를 잃은 상태였고 탄약은 사십오 일분 수준이었습니다.

여기에 전날 밤 비와 적 사격으로 무전기와 유선이 망가져 오전 열한 시경부터는 포병 지원 요청도 못 했습니다.

그리고 낙관

가장 뼈아픈 대목이 남았습니다.

당시 미군 지휘부에는 미군 모습만 보면 북한군이 물러설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근에 있던 국군 제17연대와 함께 싸우는 방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오백사십 명을 보내면 전쟁이 끝날 줄 알았던 겁니다.

돌아온 사람은 이백오십 명

피해 규모는 기관마다 집계가 다릅니다. 그대로 적겠습니다.

집계 기관미군 피해

미 육군 공식 전사 전사·부상·실종 약 150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0여 명 전사, 26명 실종
국가보훈부 부상 포함 181명 희생

그날 밤 안성에 다시 모인 인원은 약 이백오십 명이었습니다. 절반이 안 됐습니다. 중장비와 화포는 대부분 버리고 왔습니다.

북한군 피해는 미 육군 추계로 전사 약 사십 명, 부상 약 구십 명, 전차 네 대에서 일곱 대 파괴였습니다.

그 여섯 시간의 의미

졌습니다. 그것도 크게 졌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를 기억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엔군이 이 전쟁에 처음 발을 디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유엔군 참전 규모는 이렇게 커집니다.

항목수치

전투 파병국 16개국 (의료지원 5~6개국 별도)
참전 연인원 1,957,616명 (미군 1,789,000명)
1953년 동시 주둔 약 34만 1천여 명

백구십오만 명이 이 땅에 왔습니다. 그 첫 사백여 명이 죽미령에 있었습니다.

지금 죽미령에는

그 자리는 지금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시기내용

1955년 미 제24사단이 유엔군 초전기념비 건립
1982년 기념비 확장 개수
2013년 유엔군초전기념관 건립
2020년 스미스평화관 건립, 죽미령 평화공원 개장

경기 오산시 죽미령에 있고, 공원 전체 면적이 13만 4천 제곱미터가 넘습니다.

칠십육 년 전 그 아침

1950년 7월 5일 아침 여덟 시 십육 분. 그 첫 포성이 이 나라에 유엔군이 들어온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 가운데는 그 무렵 태어나셨거나 어린 시절을 피난길에서 보내신 분이 계실 겁니다. 죽미령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신 분도 계실 것이고요.

그 고개에서 여섯 시간을 버틴 사백여 명 가운데 절반이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무기도 훈련도 지뢰도 없이 보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웅담으로 쓰기에는 준비가 너무 부족했던 전투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록해 둘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준비 없이 사람을 보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여섯 시간으로 보여 준 자리이니까요.


출처 및 참고
· 부대 편성과 이동 일정, 병력 406명과 화포 구성, 전투 일시(1950년 7월 5일 오전 8시 16분 첫 포격, 오후 2시 30분 철수), 북한군 제4사단·제107전차연대, 미군 피해 150여 명과 실종 26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산전투」
· 교전 시간 6시간 15분, 희생 181명: 국가보훈부 자료
· 바주카 22발 일화, 대전차 성형작약탄 6발, 대전차 지뢰 부재, 실전 경험자 비율, 화력 62퍼센트 상실, 통신 두절, 북한군 전차 33대와 보병 4천 명, 북한군 피해, 안성 재집결 250명: 미 육군 보병지 『INFANTRY』 2022년 봄호 및 미 육군 군사사연구소 공식 전사
· 유엔군 참전 연인원 1,957,616명, 참전국 구성: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로 본 6·25전쟁』, 국가기록원
· 죽미령 평화공원과 기념시설 연혁: 한국관광공사, 경기문화재단, 국가보훈부 현충시설 자료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미군 피해는 미 육군 공식이 약 150명, 백과사전이 150여 명 전사·26명 실종, 국가보훈부가 181명으로 각각 달라 표로 병기했습니다. 전사·부상·포로를 나눈 세부 통계는 영어권 2차 자료에만 있어 싣지 않았습니다. 무반동총과 박격포 수량도 한국 자료는 각 4문, 미 육군 자료는 각 2문으로 갈려 본문에 넣지 않았습니다. 북한군 전차 대수는 33대와 36대로, 북한군 피해도 자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