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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그날의 목소리, 7·4 남북공동성명 이야기

by 인생의 쉼표 2026. 7. 4.

오늘은 7월 4일입니다. 미국에서는 독립기념일이라며 온 나라가 폭죽을 터뜨리는 날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972년 오늘,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입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조곤조곤 나눠보려고 합니다.

[라디오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앉던 그날]

제가 어릴 적, 저희 집 안방에는 나무로 된 큼직한 라디오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녁마다 볼륨을 낮게 틀어놓고 뉴스를 듣곤 하셨는데, 그 시절 라디오는 지금의 스마트폰보다 훨씬 더 귀한 물건이었지요. 그런데 1972년 7월 4일, 그날만큼은 온 식구가 라디오 앞에 바짝 모여 앉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떨렸던 것 같습니다. 남과 북이 처음으로 '통일'이라는 두 글자를 두고 함께 약속을 했다는 소식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부엌에서 하시던 일을 멈추고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나오셨고, 아버지는 담배를 문 채로 아무 말씀도 없이 라디오만 바라보셨습니다. 어린 저는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인지 잘 몰랐지만, 어른들의 표정에서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이구나' 하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당시 남과 북은 6·25 전쟁이 끝난 뒤로 서로 총부리를 겨눈 채 20년 가까이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편지 한 장 오갈 수 없었고, 서로를 '적'이라고만 부르던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꽁꽁 얼어붙은 사이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우리 쪽에서는 정보를 다루던 높은 관리였던 이후락이라는 분이 비밀리에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무도 모르게 국경을 넘어 상대편 우두머리를 직접 만나고 온 셈이니, 얼마나 조마조마한 일이었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그렇게 남과 북의 사람들이 몰래 만나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약속이 바로 7·4 남북공동성명이었습니다.

[세 가지 약속,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이 성명에는 통일을 위한 세 가지 큰 원칙이 담겼습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하나하나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자주'입니다. 통일은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거나 눈치를 보지 말고, 우리 민족끼리 스스로 풀어가자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 집안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자"는 이야기지요.

둘째는 '평화'입니다. 서로 총칼을 들이대는 방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화와 평화로운 방법으로 하나가 되자는 약속이었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생생하던 그 시절에, 다시는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다짐이 담겨 있었던 것이지요.

셋째는 '민족대단결'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달라도, 결국 우리는 같은 핏줄을 나눈 한 민족이니 크게 하나로 뭉치자는 뜻입니다. 이념이나 제도의 차이를 넘어서자는 이 말이, 저는 지금 다시 읽어도 참 뭉클합니다.

[기쁨 뒤에 남은 아쉬움]

그날의 감동은 정말 컸습니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이제 통일이 되는 거냐"며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고 하니까요. 저희 동네 어른들도 며칠 동안 그 이야기만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무렵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서도 칠판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여섯 글자를 큼직하게 적어놓고 설명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들끼리도 "이제 북에 있는 친척들도 만날 수 있는 거냐"며 신기해했지요. 실제로 그 시절에는 전쟁 통에 가족과 헤어져 서로 생사조차 모르고 살던 이산가족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분들에게 이 소식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희망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희 옆집 할머니도 이북에 두고 온 아들 이야기를 하시며 며칠을 우셨다고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애틋했을지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다만 세월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이 약속이 그대로 지켜지지는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남과 북 모두 이 성명을 각자의 정치적 필요에 이용한 측면이 있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뜨거웠던 분위기는 얼마 못 가 다시 식어버렸고, 통일의 꿈은 다시 저 멀리 밀려나고 말았지요. 어릴 적 라디오 앞에서 느꼈던 그 설렘을 떠올리면, 어른이 된 지금은 마음 한구석이 살짝 시큰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약속이 소중한 이유]

그래도 저는 7·4 남북공동성명이 여전히 값진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등을 돌린 채 살던 남과 북이 '그래도 우리는 결국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처음으로 함께 말로 꺼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으니까요. 이 세 가지 원칙은 이후에 이어진 남북 대화의 밑바탕이 되어, 세월이 흘러도 남북이 마주 앉을 때마다 다시 꺼내 드는 소중한 약속이 되었습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7월, 시원한 수박 한 조각 베어 물면서 문득 반세기도 더 전의 그날을 떠올려봅니다. 라디오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던 우리 가족, 그리고 그날 온 국민이 함께 품었던 작은 희망을요. 여러분은 오늘 7월 4일,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셨나요? 댓글로 소중한 추억 나눠주시면 독수리 오남매가 반갑게 읽어보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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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월 4일 오전 열 시

항목 내용
발표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남측 발표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북측 발표자 박성철 제2부수상
서명 이후락과 김영주.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조항 7개 항

세 가지 원칙, 원문 그대로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흔히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로 줄여 부릅니다.

그전에 오간 사람들

시기
1971년 11월 ~ 1972년 3월 정홍진과 김덕현의 판문점 비밀접촉
1972년 5월 2~5일 이후락 평양 방문. 김일성 면담
1972년 5월 29일 ~ 6월 1일 박성철 서울 방문
1972년 7월 4일 동시 발표

남북조절위원회는 여섯 번 모였습니다

회의 날짜 장소
제1차 공동위원장회의 1972년 10월 12일 판문점
제2차 공동위원장회의 1972년 11월 2~3일 평양
제3차 공동위원장회의 1972년 11월 30일 서울
제1차 본회의 1972년 11월 30일 서울
제2차 본회의 1973년 3월 15~16일 평양
제3차 본회의 1973년 6월 12~13일 서울

1973년 8월 28일 북측 공동위원장 김영주가 평양방송으로 대화 중단을 일방 선언했습니다. 구실은 두 가지였습니다.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 그리고 6월 23일 남측의 평화통일 외교정책선언이 두 개의 조선을 획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날 두 개의 헌법

이 대목이 이 성명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날짜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 선포. 국회 해산, 비상계엄 -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 투표율 91.9퍼센트, 찬성 91.5퍼센트 -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 공포·시행 사회주의헌법 채택. 주석제 신설

통일을 이야기한 지 다섯 달 만에, 남과 북이 같은 날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헌법을 내놓았습니다.


출처
· 발표 일시와 방식, 3대 원칙 원문, 7개 항: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비밀 방문 일정, 조절위원회 구성과 회의, 중단 경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4남북공동성명」, 「남북조절위원회」
· 유신 관련 수치: 한국학중앙연구원 「10월유신」
· 북한 사회주의헌법: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사회주의헌법」
확인하지 못한 것 — 서명일이 6월 28일 가서명과 6월 29일 서명으로 사료 안에 병기도었어 다소 불명확합니다. 사회주의헌법 채택일 12월 27일은 백과사전이 "1972년 12월"까지만 적고 있어 다른 자료로 보완했습니다. 두 헌법이 같은 날 나온 것을 두고 미 국무부가 우연이 아니라고 평가했다는 서술은 원문을 확인하지 못해 싣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