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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2년 5개월 만에 서울과 부산을 하루 생활권으로 — 경부고속도로 이야기

by 인생의 쉼표 2026. 7. 3.

 

오늘은 며칠 뒤면 돌아오는 7월 7일,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가 완전히 개통된 날을 조금 미리 꺼내 봅니다. 요즘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로 내려가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라, 이 길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기가 오히려 어렵죠. 그런데 이 길이 뚫린 지가 이제 겨우 반백 년 남짓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가 꼬박 걸리던 시절]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이 반나절 거리지만, 1960년대만 해도 두 도시를 오가는 건 하루를 통째로 쓰는 큰일이었어요. 비포장 국도를 덜컹거리며 몇 번을 쉬어 가야 했고, 짐을 실은 트럭은 더 오래 걸렸습니다. 물건이 제때 오가지 못하니 장사도, 공장도 속이 탔죠.

저희 어머니가 늘 하시던 이야기가 있어요. 젊은 시절 친정 나들이 한 번 가려면 새벽같이 나서서 온종일 버스에 시달리다 밤에야 도착했다고요. "길이 사람 잡던 시절"이라는 말을 어릴 적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이가 든 지금에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다들 무모하다고 했던 도로]

1968년 2월,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두고 안팎에서 걱정과 반대가 많았어요. 나라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은데 그 긴 길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돈을 빌려준다던 국제기구조차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공사는 밀어붙여졌고, 놀랍게도 총 428km에 이르는 길이 착공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에 완전히 뚫렸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세계에서도 손꼽히게 빠른 속도였어요. 연인원 9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공사에 매달렸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빠른 만큼 아팠던 자리]

다만 이 빠른 속도에는 그늘도 있었습니다. 서두르다 보니 무리한 공정이 이어졌고, 특히 대전과 대구 사이 산악 구간은 바위산을 뚫는 난공사였어요.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가 77명에 이릅니다. 지금도 고속도로 한쪽에는 이분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서 있습니다.

빠르게 이룬 것 뒤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땀과, 때로는 목숨이 있었다는 걸 저는 이 대목에서 늘 멈춰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밟고 지나가는 그 길 밑에,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수고가 깔려 있는 셈이니까요. 자랑스러운 역사일수록 그 그늘까지 함께 기억하는 게 예의가 아닐까 싶어요.

[길 하나가 바꾼 일상]

경부고속도로가 뚫리자 나라의 시간표가 통째로 바뀌었습니다. 부산항에 들어온 물건이 하루 만에 서울로 올라오고,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어요. "서울과 부산이 하루 생활권이 됐다"는 말이 그때 처음 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경제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에요. 멀어서 자주 못 보던 가족을 좀 더 자주 만나게 됐고, 낯선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도로 하나가 물건만 실어 나른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까지 좁혀 놓은 거죠. 저희 오남매가 명절마다 고향에 모일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길들이 촘촘히 이어진 덕분입니다.

[당연함 속에 숨은 이야기]

요즘 저는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가끔 창밖을 유심히 봅니다. 시원하게 뻗은 이 길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건 도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일터였다는 걸 떠올리면,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역사는 꼭 교과서 속 큰 사건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일 밟고 지나가는 이 길바닥에도 스며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문득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신다면, 반백 년 전 이 길을 처음 뚫었던 사람들을 잠깐 떠올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 뒤에 숨은 이야기를 아는 것, 그게 바로 역사를 여행하는 재미니까요.

 

이 글은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제 나름대로 정리하고,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여 쓴 글이에요. 혹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살짝 알려주세요.

키워드: 인생의 쉼표, 경부고속도로, 1970년, 한국 현대사, 산업화, 고속도로 역사, 서울 부산, 근대화, 오늘의 역사, 따분한 하루

2년 5개월, 428킬로미터

항목
착공 1968년 2월 1일
전 구간 개통 1970년 7월 7일
공사 기간 2년 5개월
총 연장 428킬로미터
총 사업비 429억 7,300만 원(순공사비 384억 5,600만, 용지비 20억 100만, 부대비 25억 1,600만)
킬로미터당 약 1억 원
연인원 892만 8,000명
투입 장비 165만 대
교량·터널 교량 346개소(19.46km), 터널 6개소(4.15km)
공사 중 사망 77명(공식)

당시 건설부 차관이 남긴 문건에 국제 비교가 있습니다. 킬로미터당 공사비가 일본의 4.5분의 1에서 7.8분의 1, 프랑스의 5.6분의 1, 미국의 2.8분의 1에서 9.2분의 1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망자 77명을 두고는 논란이 있습니다. 공사 감독관이었던 이성규는 2010년 취재에서 "실제로는 770명일 수도, 890명일 수도 있다. 7월 7일 개통에 맞춰 77명만 골랏고 일용직 잡부는 대상에서 빠졌다"고 증언했습니다. 한국도로공사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구간을 나눠 순서대로 열었습니다

날짜 구간 연장
1968년 12월 21일 잠원~수원 22.4km
1968년 12월 30일 수원~오산 13.8km
1969년 9월 2일 오산~천안 38.1km
1969년 12월 10일 천안~대전 67km
1969년 12월 29일 동대구~구서 123km
1970년 7월 7일 대전~동대구(마지막) 152km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 시간이었나

수단 소요시간
걸어서 15일
경부선 특급열차(1936년 이후) 6시간 50분
초특급 관광호(1970년) 4시간 50분
일반국도 시속 30킬로미터 17시간 47분
고속도로 시속 80킬로미터 5시간 21분
고속도로 시속 100킬로미터 4시간 17분

1970년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버스 요금은 1,600원이었습니다. 그해 쌀 80킬로그램 한 가마가 5,400원이었으니 쌀 한 가마의 30퍼센트쯤 됩니다.

반대한 사람들은 무엇을 말했나

흔히 "온 나라가 반대했다"고 하는데 사료는 다릅니다. 1968년 2월 《세대》가 각계 인사 100명에게 물었더니 무조건 찬성 68퍼센트, 조건부 찬성 27퍼센트, 반대 5퍼센트였습니다.

야당이 반대한 것은 고속도로 자체가 아니라 순서였습니다. 김대중 의원이 1968년 2월 22일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한 발언이 속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시급한 것은 동서를 뚫는 그러한 교통망이 필요하다.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남북종단에 철도와 도로를 치중하였기 때문에 그 유산으로서 이와 같은 교통 체제가 되어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재원 또 한정된 능력을 가지고 가장 발달된 그 노선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 급한 것은 뒤로 미루고 안 급한 것은 먼저 한다."

세계은행도 반대했습니다. 1966년 조사 뒤 자재와 장비 차관 3,030만 달러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 서울에서 강릉, 포항에서 여수, 대전에서 목포 같은 동서 노선을 지으면 15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반대 논거는 다섯 가지였습니다. 지방도로 정비가 더 급하다, 경부선 복선 철도가 이미 있는데 중복 투자다, 1967년 자동차 등록 대수가 5만 8천여 대뿐이라 시기상조다, 자가용을 위한 도로다, 예산에 없는 사업을 외상으로 착공했다.


출처
· 착공·개통·연장·사업비·연인원·장비·국제 비교·소요시간: 김원기(당시 건설부 차관), 「경부간 고속도로 개통의 의의」, 『지방행정』 19-201, 1970(국가기록원 공개)
· 사업비 세부, 교량·터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부고속도로」
· 사망자 논란: 주간경향 2010-02-12
· 반대 논리와 국회 발언: 최광승, 「박정희는 어떻게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였는가」, 『정신문화연구』 33-4, 2010 / 한국도로공사, 『한국고속도로십년사』, 1980
확인하지 못한 것 — 참여 업체 수는 16개사와 17개사로 자료가 엇갈립니다. 대만·태국과의 킬로미터당 공사비 비교는 어떤 사료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김대중이 굴착기 앞에 드러누웠다"는 사진은 2010년과 2018년 두 차례 조작으로 판명됐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싸게 건설했다"는 표현은 1970년 정부 홍보 문건의 자기평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