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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방정환과 어린이날, 아이를 사람으로 본 최초의 어른

by 인생의 쉼표 2026. 8. 25.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백 년 전 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아이를 아이라 부르지 않고 어린이라 부르자고, 아이에게 존댓말을 쓰자고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한복판에 방정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대목이 여럿 나옵니다.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서른한 해, 그리고 마지막 말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야주개, 지금의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31년 7월 23일 오전 여섯 시 사십오 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는 나이로 서른셋, 만으로는 서른한 살 여덟 달이었습니다.

사인은 고혈압이었습니다. 과로와 비만으로 몸이 상해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이랬습니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 네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어린이 마음은 신선과 같다는 뜻입니다.

'어린이'라는 말, 방정환이 만든 것일까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가 방정환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정확한 설명이 아닙니다.

보건복지부 산하 아동권리보장원의 아동권리 연표를 보면, 최남선이 1914년 잡지 『청춘』에 실은 「어린이의 꿈」에서 이미 어린이라는 말이 쓰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방정환이 한 일은 무엇일까요.

1920년 8월 25일, 방정환은 잔물이라는 필명으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라는 시를 번안해 잡지 『개벽』에 실었습니다. 이때부터 그가 이 말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합니다.

핵심은 말 뒤에 붙은 '이'에 있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착한이처럼 '이'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라는 말은 어린 사람을 늙은이·젊은이와 나란한 자리에 놓는 호칭이 됩니다.

그전까지 쓰던 말은 아이, 애, 어린애였습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이라고 부르던 시절입니다. 방정환이 한 일은 없던 말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있던 말을 골라내 아이를 한 사람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자리 잡게 한 것입니다.

이쪽이 오히려 더 대단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923년 5월 1일, 그날 뿌린 종이 십이만 장

어린이날이 언제 시작됐느냐는 질문에는 답이 두 개입니다. 자료마다 다릅니다.

연도내용
1921년 5월 1일천도교소년회 창립(방정환·김기전·이정호). 회원 30여 명으로 시작
1922년 5월 1일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에 '어린이의 날' 제정, 첫 행사
1923년 4월 17일조선소년운동협회 조직(천도교소년회·불교소년회·조선소년군)
1923년 5월 1일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 '제1회 어린이날' — 전국 규모

그러니까 1922년에 천도교소년회가 처음 열었고, 1923년에 여러 단체가 함께 연 것을 제1회 어린이날이라 부릅니다. 시작 연도가 두 가지로 적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923년 그날, 서울 거리에 선전 전단 십이만 장이 뿌려졌습니다. 그 종이에 적힌 것이 「소년운동의 선언 세 가지 조건」입니다.

  •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하게 하라
  •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열네 살 이하의 유상·무상 노동을 폐하게 하라
  • 어린이가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가정과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두 번째 조항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열네 살 이하 아이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이런 요구를 굳이 종이에 적어 뿌려야 했다는 것은, 그때 열 살 남짓 아이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어른에게 드리는 글

같은 날 뿌려진 전단에는 「어른에게 드리는 글」 아홉 항목도 있었습니다. 그중 몇 개를 옮깁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사 자주 이야기를 하여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그리고 같은 날 「어린이날의 약속」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 하고 자기의 물건같이 여기지 말고….
어른은 뿌리라면 어린이는 싹입니다. 뿌리가 근본이라고 위에 올라앉아서 싹을 내려누르면 그 나무는 죽어버립니다.

백 년 전 문장입니다. 지금 읽어도 낡은 데가 없습니다.

참고로 이 선언은 국제연맹의 제네바 아동권리선언보다 한 해 앞섭니다. 다만 이를 두고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선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동문학가 윤석중의 평가이지 국제적으로 공인된 지위는 아닙니다. 이 점은 정확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5월 5일이 된 사연 — 흔한 오해 하나

여기서 널리 퍼진 오해를 하나 바로잡겠습니다.

인터넷에는 "일제가 어린이날을 5월 1일에서 5월 5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1차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1927년 10월 16일, 조선소년연합회가 창립되면서 방정환이 위원장을 맡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듬해부터 어린이날을 5월 첫째 일요일로 바꾸기로 결의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 5월 1일이 노동절과 겹친다
  • 평일이라 일제가 학생 동원을 방해해 행사를 치르기 어렵다

바꾼 주체는 조선인 단체였고, 바꾼 결과는 5월 5일이 아니라 5월 첫째 일요일이었습니다.

날짜가 5월 5일로 고정된 것은 광복 뒤입니다. 1946년 5월 5일 기념식을 다시 열면서 그날로 정해졌습니다. 그 사이 1937년을 마지막으로 어린이날은 중단되어 있었습니다.

연도제도 변화
1946년5월 5일로 지정, 기념식 재개
1961년아동복리법 제정 시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규정
1973년 3월법정기념일 지정
1975년 1월법정공휴일 지정
2018년대체공휴일 적용 시작

어린이날이 공휴일이 된 것이 1975년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 가운데는 어린이날에 학교에 가셨던 분이 적지 않습니다.

잡지 『어린이』, 삼만 부의 무게

1923년 3월 20일 개벽사에서 잡지 『어린이』가 창간됩니다. 1934년 7월 통권 122호로 폐간될 때까지 십일 년을 이어갑니다.

발행 부수는 1925년 무렵 약 삼만 부였습니다. 당시 최고 판매 부수였습니다.

여기서도 흔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십만 부가 팔렸다"는 이야기인데, 삼만 부에 도달한 뒤 "십만 어린이 독자"라는 말을 구호로 쓰기 시작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입니다. 부수는 삼만, 십만은 구호로 구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잡지가 배출한 이름들이 놀랍습니다. 마해송, 윤석중, 이원수, 박목월, 정인섭. 그리고 실린 노래들은 지금도 우리가 부르는 것들입니다.

  • 윤극영 「반달」
  • 이원수 「고향의 봄」
  • 서덕출 「봄편지」
  • 유지영 「고드름」
  • 방정환 「형제별」

「반달」과 「고향의 봄」이 이 잡지에서 나왔습니다. 백 년 전 아이들이 처음 읽은 그 노래를 지금 손주들이 부르고 있는 셈입니다.

독립운동가 방정환

아동문학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는 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입니다.

1919년 3·1운동 때 자택에서 『조선독립신문』을 등사해 배포했고,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다 붙잡혀 고문을 받았습니다. 일주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스무 살 때입니다.

그의 장인이 손병희였습니다. 민족대표 삼십삼 인이자 천도교 삼대 교주였던 그 사람입니다. 1917년에 손병희의 셋째 딸과 결혼했습니다.

연도서훈
1978년 10월금관문화훈장
1980년건국포장
1990년건국훈장 애국장
2017년 5월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어록비가 세워졌습니다.

왜 어린이였을까

그가 자주 하던 말이 있습니다.

십 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

1922년 첫 어린이날 행사에서 뿌린 전단에도 적혀 있던 문구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스물 몇 살 청년이 택한 방법이 아이들이었습니다. 지금 싸워 이길 수 없다면 십 년 뒤에 이길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잡지를 만들고, 동화를 번역하고, 전국을 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른들에게 존댓말을 쓰라고 부탁하는 일이 그에게는 독립운동이었던 셈입니다.

그가 스물세 살에 낸 첫 책 『사랑의 선물』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갑고 어두운 가운데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을 위하여 그윽이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당시 학령 아동의 육십오 퍼센트 이상이 보통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학교 대신 밭에 나가고 나무를 하고 소를 먹이던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향해 그는 어린이라고 불렀고, 존댓말을 쓰자고 했습니다.

서른한 살에 두고 간 것

서른한 해를 살고 갔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제 막 자리를 잡을 나이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그는 잡지 하나를 십일 년 가는 매체로 만들었고, 어린이날을 세웠고, 「반달」과 「고향의 봄」이 세상에 나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부르는 말을 바꿔 놓았습니다.

오월 오일에 손주에게 선물을 사 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다만 그날이 어떻게 생겼는지, 백 년 전 어떤 청년이 무슨 마음으로 종이 십이만 장을 뿌렸는지 한 번쯤 이야기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아 달라던 그 부탁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출처 및 참고
· 생몰, 사망 시각, 유언, 묘비 동심여선, 천도교소년회 창립(1921년 5월 1일), 1922년 어린이의 날, 1923년 제1회 어린이날, 1927년 조선소년연합회의 날짜 변경 결의와 이유, 『어린이』 창간일과 발행부수 3만 부: 한국방정환재단 「생애연보」
· 1923년 「소년운동의 선언 세 가지 조건」, 「어른에게 드리는 글」, 「어린이날의 약속」 원문: 한국방정환재단 「국내 어린이선언」(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3면 원문 게재)
· 최남선의 1914년 『청춘』 용례, 1946년 5월 5일 지정, 1937년 중단: 아동권리보장원(보건복지부) 「대한민국 아동권리역사관 아동권리 연표」
· '어린이'의 '이'가 높임말이라는 설명, 잡지 『어린이』 폐간과 배출 문인, 학령 아동 미취학 65퍼센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린이」
· 3·1운동 참여, 손병희와의 관계, 서훈(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독립기념관 어록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방정환」
· 1961년 아동복리법, 1973년 법정기념일, 1975년 법정공휴일, 2018년 대체공휴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린이날」, 아동권리보장원 연표, 국가기록원
· 『사랑의 선물』 머리말, 전단 12만 장: 독립기념관 월간지 「어린이날에 깃든 독립운동」
· 사인(고혈압): 경향신문 2010년 7월 22일자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어린이날 시작 연도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에서도 항목마다 1922년과 1923년으로 다르게 적고 있어 두 해를 구분해 서술했습니다. 사인은 고혈압과 신장염 두 가지가 도는데 신장염은 1차 출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어린이』 발행부수는 3만 부(재단)와 독자 10만 명(독립기념관 월간지)으로 엇갈립니다. 서훈 내역도 재단 연보는 1980년 애국장으로 적고 있으나 백과사전과 국가보훈처 발표가 일치하는 1980년 건국포장·1990년 애국장을 따랐습니다. 색동회 창립일도 3월 16일·3월 30일·5월 1일 세 날짜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아동 노동 인구와 영아사망률은 조선총독부 통계 자체가 학계에서 왜곡으로 판정되어 수치를 싣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바꿨다"는 널리 퍼진 이야기는 1차 출처에서 확인되지 않아 본문에서 바로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