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12월, 한 의사가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아내와 여섯 자녀 가운데 아들 하나만 데리고였습니다. 며칠이면 다시 만날 줄 알았습니다.
그는 마흔다섯 해를 더 살았고,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경성의전 수석 졸업생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한학자 아버지가 세운 학교를 다니고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습니다.
1932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연도내용
| 1911년 | 평안북도 용천 출생 |
| 1932년 | 경성의학전문학교 수석 졸업 |
| 1940년 | 의학박사 학위 취득, 평양 기휼병원 외과과장 |
| 1947년 | 평양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
| 1950년 12월 | 차남만 데리고 월남 |
| 1951년 | 부산 복음병원 설립 |
| 1968년 |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창립 |
| 1979년 | 막사이사이상 수상 |
| 1995년 12월 25일 | 별세 |
스물일곱 살 무렵 경성의전 부속병원에 있을 때, 척추결핵으로 입원한 춘원 이광수의 주치의를 맡았습니다. 춘원의 소설 「사랑」에 나오는 의사 안빈의 실제 모델이 그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날, 차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1950년 12월, 그는 평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아내 김봉숙과 여섯 자녀 가운데 다섯을 북에 남기고, 차남 장가용만 데리고였습니다.
남겨진 사람이 여섯, 데리고 온 사람이 하나였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평양을 빠져나오던 길에 피난 행렬 속에서 아내와 딸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차 안에 응급 환자가 있어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여러 평전에 나오지만 정부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공식 자료가 확인해 주는 것은 1950년 12월에 아들 하나만 데리고 내려왔다는 사실까지입니다.
천막에서 시작한 병원
부산에 내려온 이듬해, 1951년 영도의 한 교회 안에 무료 진료소를 열었습니다. 직원 셋으로 시작했고, 그해 겨울에는 천막 진료소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복음병원입니다. 그는 1976년까지 스물다섯 해 동안 이 병원 원장으로 일했습니다.
돈 없는 환자를 그냥 돌려보내지 못했습니다. 병원비를 못 내는 사람에게 밤에 뒷문으로 나가라고 일러 줬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1차 기록으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723명으로 시작한 의료보험
이제 그의 가장 큰 업적입니다. 이건 숫자가 분명합니다.
1968년, 부산의 스물세 개 교회 단체 대표들이 모여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영자 의료보험조합이었고, 조합장이 장기려였습니다.
시작할 때 회원이 723명이었습니다.
시기회원 수
| 1968년 창립 | 723명 |
| 1969년 2월 | 부산의료협동조합(1만 2천 명)과 통합 |
| 1974년 | 부산시 지원으로 영세민 약 5천 명 가입 |
| 1979년 | 2만 명 돌파 |
| 1989년 6월 | 회원 20만 명을 국가 의료보험에 넘기고 해체 |
스물한 해 만에 723명이 20만 명이 되었습니다.
운영 방식이 지금 봐도 정교합니다. 병원비의 40퍼센트는 할인, 30퍼센트는 조합이 부담, 30퍼센트만 본인 부담이었습니다. 의료비뿐 아니라 장례비와 분만비까지 지원했습니다.
1969년에는 보건사회부가 이 조합을 자영자 의료보험 시범사업장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전주, 원주, 거제도로 같은 방식이 퍼져 나갔습니다.
1989년 조합이 해체될 때 회원 이십만 명은 국가 의료보험으로 넘어갔고, 조합 운영자들은 의료보험공단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건강보험의 밑그림 한 자락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의사로서의 기록
봉사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사로서도 앞서 있었습니다.
1943년에 간에 생긴 암을 쐐기 모양으로 잘라 내는 수술을 해 학회지에 발표했고, 1959년에는 한국인의 간 대량절제 수술에 국내 최초로 성공했습니다. 이 업적으로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받았습니다.
1974년에는 한국간연구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집이 없었습니다
상은 받을 만큼 받았습니다.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 부문, 그 밖에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호암상도 받았습니다.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는 집이 없었습니다. 기념사업회 공식 자료의 문장을 그대로 옮깁니다.
1975년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집 한 채가 없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준 20여 평 관사가 전부일 정도로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였다.
병원 옥상 스무 평 남짓. 그것이 평생 살던 집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통장에 얼마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여럿 돌아다니는데, 액수는 확인하지 못해 여기에 적지 않겠습니다. 옥상 관사 스무 평이면 충분히 설명되는 것 같습니다.
1991년에 온 편지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1991년, 미국에 있는 친지를 통해 북에 가족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아내의 편지와 가족사진이 함께 왔습니다.
사십 년 만이었습니다. 그는 재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이른 새벽,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상봉은 그가 떠난 뒤에 이루어집니다. 2000년 8월, 아들 장가용 교수가 평양 보통강호텔에서 어머니 김봉숙을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데리고 내려왔던 그 아들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를 만난 것입니다.
왜 그를 바보라 불렀나
사람들은 그를 바보 의사라고 불렀습니다.
서울대와 부산대, 가톨릭대에서 교수를 지낸 사람이 평생 셋집도 아닌 병원 옥상에 살았으니 그럴 만합니다. 돈 없는 환자를 받고,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에 조합을 만들어 이십만 명을 거기 넣고, 정작 자기 몫은 챙기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그가 남긴 것을 보면 바보라는 말이 잘 안 어울립니다. 청십자에서 시작한 방식이 지금 오천만 명이 쓰는 건강보험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스물한 해 동안 밀어붙인 일이 제도가 된 것입니다.
지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 가운데는 그 시절 부산에서 청십자 카드를 들고 병원에 가 보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랐을 겁니다.
사십 년을 기다리다 편지 한 통을 받고 사 년 뒤에 떠난 사람. 성탄절 새벽이었다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출처 및 참고
· 생몰, 출생지, 경성의전 1932년 수석 졸업, 의학박사(1940년), 교수 경력, 복음병원 설립(1951년)과 25년 원장, 1943년 간 설상절제·1959년 간 대량절제 국내 최초 성공,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 1974년 한국간연구회 초대 회장, 막사이사이상(1979년), 이광수 「사랑」의 안빈 모델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기려」
· 1950년 12월 아내와 5남매를 남기고 차남만 데리고 월남, 1991년 아내의 편지와 사진 수령, 1995년 12월 25일 새벽 별세, 병원 옥상 20여 평 관사, 국민훈장 동백장(197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2006년): 부산과학기술협의회 성산 장기려 기념사업 자료
·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창립(1968년, 회원 723명), 회원 수 변천, 급여 구조, 장례비·분만비 지원, 1969년 시범사업장 지정, 1989년 6월 회원 20만 명으로 해체와 국가 의료보험 귀속, 타 지역 확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부산문화대전)』 「청십자의료보험조합」
· 2000년 8월 차남 장가용 교수의 평양 상봉: 언론 보도
확인하지 못한 것 — 흥남철수 배로 월남했다는 서술은 1차 자료 어디에도 없어 쓰지 않았습니다. 공식 기록은 1950년 12월 월남까지만 밝히고 있습니다. 평양을 빠져나오며 피난 행렬 속 가족을 보고도 차를 세우지 못했다는 대목, 병원비를 못 내는 환자를 뒷문으로 내보냈다는 일화, 복음병원 초기 하루 진료 인원,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재산 액수, 1985년 이산가족 상봉 초청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1차 출처를 확인하지 못해 사실로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을 수술했다는 이야기도 공식 기록에 없어 싣지 않았습니다. 청십자 조합원 수는 부산문화대전의 20만 명을 따랐으며, 일부 학술자료는 23만 명으로 적고 있습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호암상은 백과사전이 연도 없이 열거해 연도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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