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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유일한과 유한양행, 전 재산을 사회에 남긴 기업가의 유언

by 인생의 쉼표 2026. 8. 19.

1971년 4월, 한 기업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아들에게 남긴 문장이 한 줄 있었습니다.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말이었습니다. 회사 주식은 전부 사회에 내놓았습니다.

유일한 박사 이야기입니다. 워낙 유명한 일화라 많이들 알고 계실 텐데, 이번에 자료를 확인해 보니 인터넷에 도는 이야기와 실제 기록이 조금씩 다른 대목이 있었습니다. 원문에 가깝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홉 살에 혼자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유일한은 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구 남매 중 맏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미국으로 간 것은 1904년, 아홉 살 때입니다. 대한제국 순회공사를 따라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나라가 기울어 가던 때, 아들만이라도 배우게 하려던 아버지의 결정이었습니다. 네브래스카주 커니라는 작은 도시의 미국인 자매 집에 맡겨졌습니다.

연도
1895년 1월평양 출생
1904년아홉 살에 도미
1909년박용만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 입학
1916년~1919년미시간대학교 상과 입학과 졸업
1922년라초이 식품회사 설립
1926년서울 종로2가에 유한양행 창립
1971년 3월 11일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

열네 살에는 한인소년병학교에 들어갑니다. 박용만이 네브래스카에 세운 독립군 사관학교였습니다. 미국에서 자란 조선 소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던 곳입니다. 고등학교 때는 미식축구 선수로 장학금을 받았고, 1916년 미시간대학교 상과에 들어가 1919년에 졸업했습니다.

숙주나물 통조림으로 번 돈

대학을 나온 그가 시작한 사업은 뜻밖에도 식품이었습니다.

1922년, 대학 동창과 함께 라초이 식품회사를 세웁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동양 음식 재료를 파는 회사였고, 주력 상품이 숙주나물 통조림이었습니다. 미국인들에게는 낯선 식재료였지만 이 사업이 크게 성공합니다. 1925년까지 오십여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백 년 전의 오십만 달러입니다.

참고로 라초이는 지금도 미국에서 팔리는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회사를 정리하고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버드나무를 심벌로 삼은 이유

1926년, 서울 종로2가 덕원빌딩에서 유한양행이 문을 엽니다.

창립 신념은 이랬습니다.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사 심벌인 버드나무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서재필이 선물한 버드나무 목각을 그대로 심벌로 삼은 것입니다. 서재필의 딸이 만든 판화였다고 전합니다. 그의 성인 버들 류(柳) 자와도 맞아떨어졌습니다. 지금도 유한양행 제품에는 이 버드나무가 들어갑니다.

초기에는 미국에서 피부병약, 결핵약, 구충제를 들여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1933년, 자체 개발 의약품 1호로 안티푸라민을 내놓습니다. 지금까지 구십 년 넘게 팔리고 있는 제품입니다. 집집마다 약통에 하나쯤 들어 있던 그 파란 통입니다.

독립운동가 유일한

기업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는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입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합니다.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기초하는 위원으로 뽑혀 이를 낭독했습니다. 스물네 살 때입니다.

가장 놀라운 대목은 광복 직전의 일입니다. 미국 전략정보국이 추진한 냅코 작전이라는 한반도 침투 계획이 있었습니다. 조선인 열아홉 명이 참가했는데, 유일한이 그중 한 조의 조장이었습니다. 목표는 서울에 잠입해 경제 상황과 일본군 주둔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한 섬에서 서너 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쉰 살이었습니다. 민간인 신분이었고, 참가자 열아홉 명 가운데 오십 대는 두 명뿐이었습니다. 미국에 안정된 사업과 가족이 있는 쉰 살 기업인이 낙하산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세금 이야기, 그리고 훈장

기업인 유일한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세금입니다.

그는 1930년대에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습니다. 회사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 준 것입니다. 1962년에는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공개하고 상장했습니다. 국내 기업 전체로는 두 번째였습니다.

1967년에는 국세청으로부터 국내 기업 최초로 모범납세업체로 선정됩니다. 오차 없는 납세 실적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듬해인 1968년 3월 4일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널리 알려진 세무조사 일화가 있습니다. 정치자금 제공을 거절한 뒤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정부는 탈세 증거를 찾지 못했고, 오히려 내지 않아도 될 세금까지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일화에 흔히 붙는 극적인 대사들, 조사관들이 무슨 말을 했다거나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였다는 대목은 1차 출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적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1969년, 일흔넷의 나이에 은퇴하면서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아들이 있었는데도 그랬습니다.

유언장에 적혀 있던 것

이제 유언장입니다.

1971년 3월 11일 오전 열한 시 사십 분, 세브란스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일흔여섯이었습니다. 유언장은 4월 4일 개봉되어 4월 8일 공개되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가 정리한 유언장의 네 조항은 이렇습니다.

대상내용
손녀 유일링(당시 일곱 살)대학 졸업 때까지 학자금 1만 달러
딸 유재라유한공고 안의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 유한동산으로 꾸미되 울타리를 치지 말 것
사회소유 주식 14만 941주 전부를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
아들 유일선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라

딸에게 남긴 조항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되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학교와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어린 학생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물려주면서 담을 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 무덤 위로 아이들이 뛰어다니게 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주식 14만 941주의 시가는 2억 2,500만 원이었고, 손녀 학자금 1만 달러는 우리 돈 320만 원이었습니다. 미국에 있던 장남에게는 일체의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먼저 세웠습니다

재산을 사회에 내놓은 것이 세상을 떠나면서 갑자기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훨씬 전부터 하던 일이었습니다.

연도내용
1952년소사공장에 고려공과기술학교 설립. 학비와 기숙사비 전액 무료
1963년개인 주식 1만 7천 주를 연세대와 보건장학회에 기증
1964년학교법인 유한학원 설립, 유한공업고등학교 건립
1965년유한교육신탁기금 발족. 개인 주식 5만 6천 주 희사
1970년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 설립(현 유한재단의 전신)
1977년재단법인 유한재단으로 전환
1978년유한공업전문대학(현 유한대학교) 설립

육이오가 끝나기도 전인 1952년에 공장 안에 기술학교를 세웠습니다. 학비도 기숙사비도 받지 않았습니다.

딸 유재라는 1991년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 몫으로 받은 재산을 다시 유한재단과 모교에 내놓았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오천 평도 결국 사회로 돌아간 셈입니다.

남은 것

유한양행 자료에는 그가 남긴 유품이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이 전부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회사 공식 자료이니 그대로 옮겨 둡니다.

2004년 부천시는 경인고속도로 부천 구간 육 킬로미터에 '유일한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업인의 이름을 도로에 붙인 첫 사례였습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많습니다. 그중 자기 이름으로 재산을 남기지 않은 사람은 드뭅니다. 아홉 살에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이 일흔여섯에 남긴 것은 주식 십사만 주가 아니라, 담장 없는 동산 하나와 문장 몇 줄이었습니다.

손자에게 물려줄 것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고 보면, 그 문장이 다르게 읽힙니다.


출처 및 참고
· 생몰, 도미(1904년, 아홉 살), 한인소년병학교(1909년), 미시간대 입학과 졸업(1916년, 1919년), 라초이 설립(1922년), 유한양행 창립(1926년), 안티푸라민(1933년), 종업원 지주제, 유한학원과 유한공고(1964년), 신탁기금(1970년), 유한재단(1977년), 동탑산업훈장(1968년 3월 4일), 건국훈장 독립장(1995년 8월 15일): 유한양행 공식 「창업자 유일한 – 걸어온 길」, 유한재단 「연대기」
· 라초이 수익 50여만 달러, 1962년 제약업계 최초 상장(국내 두 번째), 1967년 모범납세업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일한」·「유한양행」
· 버드나무 심벌,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세무조사 결과: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독립운동을 한 민족 기업가, 유일한」
· 냅코 작전 개요(참가자 19명, 조장, 훈련 기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냅코 프로젝트」
· 유언장 4개 조항: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주식 수와 시가, 유언장 개봉·공개 일자: 1971년 조선일보 보도를 인용한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부천문화대전
· 유일한로 명명(2004년): 디지털부천문화대전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유한양행 창립 월과 일은 자료에 따라 6월과 12월로 갈려 연도만 적었습니다. 종업원 지주제 도입 연도도 1936년과 1939년으로 나뉘어 "1930년대"로 표기했습니다. 학력은 유한양행 공식 자료와 백과사전이 대학원 과정을 다르게 적고 있어 미시간대까지만 적었습니다. 널리 회자되는 세무조사 일화의 구체적 대사, 아들이 학자금 일부만 쓰고 나머지를 기부했다는 후일담, 주식 배분 비율 수치는 1차 출처를 찾지 못해 넣지 않았습니다. 유품이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이었다는 서술은 유한양행 홍보 자료에 근거한 것입니다.
통계는 발표 시점 자료이며 이후 갱신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