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이야기

이태석 신부, 톤즈의 등불 — 총 대신 악기를 들려준 사람

by 인생의 쉼표 2026. 8. 22.

아프리카의 외딴 마을에서 아이들이 부는 트럼펫과 클라리넷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오랜 내전으로 총소리에 익숙하던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손에 총 대신 악기를 쥐여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사이자 사제였던 이태석입니다.

이 이야기는 워낙 널리 알려져 있어 저도 대충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하나씩 확인해 보니 제가 모르던 숫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숫자들과 함께 이 사람의 일생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부산 남부민동에서 아프리카까지

이태석은 1962년 10월 17일 부산 서구 남부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십 남매 가운데 아홉째였고, 초등학교 이 학년이던 1970년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어머니 혼자 열 아이를 건사한 집이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들이 택한 길은 의대였습니다. 1981년 경남고를 졸업하고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 1987년에 졸업했습니다. 부산백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복무한 뒤 1991년 육군 대위로 전역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전역한 그해 팔월, 그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들어갑니다. 의사 면허를 손에 쥔 스물아홉 살 청년이 사제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연도
1962년 10월부산 남부민동 출생
1987년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91년 8월살레시오 수도회 입회
1999년 8월선교 체험 중 남수단 톤즈 첫 방문
2001년 6월사제 서품
2001년 12월톤즈 부임
2008년 11월휴가차 귀국, 대장암 진단
2010년 1월 14일선종

톤즈를 처음 본 것은 1999년 여름이었습니다. 케냐에서 선교 체험을 하던 중 인도 출신 신부의 안내로 그 마을에 갔습니다. 한센인 마을에 의사가 없다는 말을 듣고 간 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된 뒤 2001년 12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그가 도착한 땅은 어떤 곳이었나

이 대목에서 잠깐 배경을 봐야 합니다. 그가 간 곳이 그저 '가난한 아프리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남수단 지역은 1955년부터 1972년까지 한 차례, 1983년부터 2005년까지 다시 한 차례 내전을 겪었습니다. 유엔 추산으로 이 내전에서 약 이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사백오십만 명이 피난민이 되었습니다. 이태석이 톤즈에 도착한 2001년은 두 번째 내전이 십팔 년째 이어지던 해였습니다.

의료 사정을 보여 주는 숫자는 더 참담합니다. 남수단이 2011년 독립할 무렵 인구 약 팔백만 명에 의사는 백이십 명 남짓이었습니다. 등록 간호사는 백 명 정도였고, 나라 안에 의사를 길러 낼 의과대학이 없었습니다. 주민의 십육 퍼센트만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지표수치기준
내전 사망자약 200만 명1983~2005년, 유엔 추산
의사 수인구 800만 명에 약 120명2011년 독립 무렵
모성사망비10만 명당 2,054명(세계 최고)2006년 남수단 가구보건조사
성인 문해율26.8%2008년, 유네스코 통계
영아사망률1,000명당 66.4명2011년, 유엔 아동사망추정그룹

모성사망비가 십만 명당 이천 명이 넘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어머니가 목숨을 잃는 일이 흔했다는 뜻입니다. 성인 열 명 가운데 일곱은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이런 곳에 의사 한 사람이 들어간 것입니다.

움막에서 시작해 병실 열두 개까지

처음 진료를 시작한 곳은 마른 풀과 대나무로 얽은 움막이었습니다. 그는 반경 백 킬로미터 안에서 유일한 의사였습니다.

2004년, 직접 벽돌을 구워 병실 열두 개짜리 시멘트 건물을 지었습니다. 하루에 이백 명, 많을 때는 삼백 명을 진료했습니다. 인근 여든 개 남짓한 마을을 돌며 순회 진료와 예방접종도 했습니다. 말라리아와 장티푸스, 콜레라, 결핵, 한센병이 주된 병이었고 부족 간 싸움에서 생긴 총상과 자상도 흔했습니다.

학교도 세웠습니다. 전쟁으로 무너진 학교를 고쳐 초등부터 고등까지 열한 해 과정을 운영하고 기숙사를 지었습니다. 수학과 음악은 본인이 직접 가르쳤습니다.

한센인 마을에는 벽돌집을 지어 주고 지하수 펌프를 놓았습니다. 뭉개진 발에 맞는 신발을 따로 만들어 신겼습니다. 매일 그 마을을 찾아가 진료를 하고 식량을 나눴습니다. 그가 남긴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하고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한센인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라는 대목입니다.

총 대신 악기, 서른다섯 명의 브라스밴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브라스밴드입니다.

음악반에서 시작한 것이 서른다섯 명 규모의 브라스밴드가 되었습니다. 남수단 최초의 브라스밴드였습니다. 트럼펫과 클라리넷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신부가 설명서를 읽어 가며 직접 가르쳤습니다.

왜 하필 악기였을까요. 총소리를 들으며 자란 아이들에게 다른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이 밴드는 훗날 2012년 한국을 찾아와 공연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두 해 뒤의 일입니다.

돌아오지 못한 길, 그리고 남은 사람들

2008년 11월 휴가차 귀국해 받은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톤즈로 끝내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투병 기간에도 병원이 아니라 서울 대림동의 수도 공동체에 머물며 곡을 쓰고 밴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2010년 1월 14일 오전 다섯 시 삼십오 분, 서울성모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 마흔일곱, 우리 나이로 마흔여덟이었습니다. 마지막 말은 모든 것이 좋다는 뜻의 짧은 한마디였다고 전합니다.

장례미사에는 천오백 명가량이 다녀갔습니다. 유해는 전남 담양의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그해 사월 방송된 다큐멘터리가 그를 온 나라에 알렸고, 2010년 9월 9일 극장판이 개봉해 사십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습니다.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인 기록이었습니다.

연도내용
2010년 9월다큐멘터리 극장판 개봉. 관객 약 44만 명
2011년 7월제1회 국민추천포상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2012년 1월사단법인 이태석재단 출범
2018년남수단 대통령훈장 추서. 남수단 교과서에 생애 수록
2020년 1월부산 서구에 이태석 신부 기념관 개관

제자들이 의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가 가장 마음이 움직인 대목은 여기입니다.

톤즈의 허름한 학교에서 그에게 배운 아이들이 자라 의과대학에 갔습니다. 2025년 기준으로 이태석재단이 지원한 남수단 의대생은 오십 명, 그 가운데 열두 명이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졸업 후 한센인 마을과 지역 병원으로 돌아가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남수단 최초의 신경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교육병원에서 수련을 마쳤는데,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한 한국 청년의 부모가 그의 육 년치 학비를 대 주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두 사람은 한국에서 의사 면허를 따고 전문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제자들이 진료할 때 "어디가 아프세요"보다 환자 손을 먼저 잡는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하시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배운 것은 의술만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사람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칠 년밖에 그곳에 있지 못했고, 마흔일곱에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 그가 가르친 아이들이 그 마을에서 청진기를 들고 있습니다. 짧게 살고 길게 남는 삶이 어떤 것인지, 이 이야기가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출처 및 참고
· 생몰, 학력, 서품, 톤즈 부임과 활동, 병원 건립(2004년, 병실 12개), 하루 진료 200~300명, 순회 진료 마을 약 80곳, 학교 11년 과정, 브라스밴드 35명, 국민훈장 무궁화장(2011년 7월), 남수단 대통령훈장(2018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이태석신부 기념실 「이태석 약력」·「이태석의 삶」, 이태석재단 「약력」, 살레시오회 국제 회보, 가톨릭신문(2010년 1월 20일)
· 남수단 내전 사망자 약 200만 명, 의사 수, 모성사망비, 의료 접근성: 국제 학술지 랜싯(The Lancet) 2011년 6월 25일자 남수단 보건 상황 보고
· 성인 문해율 26.8퍼센트(2008년), 영아사망률(2011년): 유네스코 통계연구소, 유엔 아동사망추정그룹 자료
· 남수단 독립(2011년 7월 9일)과 유엔 가입(7월 14일, 193번째 회원국): 유엔 공식 자료
· 제자 지원 현황(2025년 기준 의대생 50명 중 12명 의사): 이태석재단 이사장 인터뷰(2025년 11월)
수치가 엇갈리는 부분 — 사제 서품 연도는 자료에 따라 2000년과 2001년이 갈리는데, 2000년은 부제 서품이고 사제 서품은 2001년입니다. 톤즈 활동 기간은 7년(인제대 자료)과 8년(일부 언론)으로 표기가 다릅니다. 향년은 만 47세와 48세가 함께 쓰입니다. 다큐멘터리 관객 수는 40만~44만 명으로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영화진흥위원회 원자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제자 수도 집계 기준과 연도에 따라 다르게 보고되어 본문에는 재단이 밝힌 2025년 기준만 적었습니다.
싣지 않은 이야기 — 널리 회자되는 몇몇 일화는 1차 출처를 확인하지 못해 넣지 않았습니다.
통계는 발표 시점 자료이며 이후 갱신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