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 봄, 예순 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는 바닷가였고, 목적은 소금 한 줌을 집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줌 때문에 대영제국이 흔들렸습니다.
간디의 소금 행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우리가 남의 나라 일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해 조선의 신문들이 이 행진을 유난히 자세히 보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마지막에 하겠습니다.
소금에 세금을 매긴다는 것
먼저 왜 하필 소금이었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영국은 1882년 인도 소금법을 만들어 소금의 제조와 수집, 판매를 정부가 독점했습니다. 민간인이 소금을 만들거나 파는 것은 범죄였고, 걸리면 소금을 빼앗기고 최대 징역 여섯 달을 살았습니다. 세무관은 불법 제조 현장에 문을 부수고 들어가 소금과 그릇, 운반 수단까지 압수해 부술 수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얻는 것조차 불법이었다는 뜻입니다.
부담은 가난한 사람에게 몰렸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세율이 높던 시기에 평범한 노동자 가족은 한 해 소금값으로 두 달치 급여를 썼습니다. 소금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똑같이 먹어야 하는 것이니, 소득이 적을수록 부담 비율이 커지는 세금이었습니다.
간디는 이 세금을 두고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서 볼 때 모든 세금 가운데 가장 사악한 것"이라고 썼습니다. 1930년 3월 2일 어윈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스물다섯 날, 385킬로미터
1930년 3월 12일 오전 여섯 시 삼십 분, 사바르마티 아슈람을 나섰습니다. 함께 걸을 사람은 일흔여덟 명이었습니다.
| 항목 | 내용 |
|---|---|
| 출발 | 1930년 3월 12일, 사바르마티 아슈람 |
| 도착 | 1930년 4월 5일, 단디 |
| 소금법 위반 | 1930년 4월 6일 아침, 단디 바닷가 |
| 거리 | 약 240마일(385킬로미터) |
| 기간 | 25일(걸은 날 22일, 쉰 날 3일) |
| 동행 | 출발 78명 → 도착 무렵 수만 명 |
하루에 십오 킬로미터에서 이십사 킬로미터를 걸었습니다. 가장 많이 걸은 날은 사월 사일로 삼십 킬로미터가 넘었습니다. 강을 세 번 건넜습니다.
함께 걸은 일흔여덟 명의 명단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여기에 눈길 가는 대목이 있습니다. 가장 어린 사람이 열여섯 살이었고, 인도 전역에서 모였을 뿐 아니라 네팔 사람 둘과 피지에서 태어난 사람 한 명도 있었습니다. 불가촉천민 출신 열여덟 살 직조공도 명단 열두 번째에 올라 있습니다. 신분으로 사람을 나누던 나라에서, 그 줄에는 신분이 없었던 겁니다.
간디의 둘째 아들과 스무 살 손자도 함께 걸었습니다.
예순 살 노인이 걷는다는 것
간디는 1869년 10월 2일생이니 출발 당시 만 예순 살, 우리 나이로 예순둘이었습니다. 자료에 따라 예순한 살로 적기도 합니다.
왜 굳이 걸었을까요. 기차를 타면 하루면 갈 거리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 행진의 방법이었습니다. 걸으면 마을을 지나게 되고, 마을을 지나면 사람들이 나와서 봅니다. 예순 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매일 걷고 있다는 소식이 앞서 달려가고, 다음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미리 나와 기다립니다. 그렇게 스물다섯 날 동안 일흔여덟 명이 수만 명이 되었습니다.
떠나면서 간디는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스와라지, 곧 자치를 얻기 전에는 아슈람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그는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십오 년을 바쳐 일군 그 아슈람으로 끝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한 줌을 집은 뒤에 일어난 일
4월 6일 아침, 단디 바닷가에서 간디는 소금을 한 줌 집었습니다. 그것으로 소금법을 어겼습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 날짜 | 일 |
|---|---|
| 1930년 4월 14일 | 네루 체포 |
| 4월 24일 | 페샤와르에서 군부대가 시위대 발포 명령을 거부 |
| 4월 25일~5월 4일 | 페샤와르에서 경찰과 군대가 철수, 열흘간 시민이 도시를 관리 |
| 5월 5일 새벽 | 간디 체포, 예라브다 감옥 수감 |
| 5월 21일 | 다라사나 제염소 진입, 수백 명 부상 |
| 1930년 말 | 약 6만 명 수감 |
| 1931년 3월 5일 | 간디-어윈 협정 체결 |
그해 안에 인도에서 육만 명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소금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4월 24일 페샤와르에서 있었던 일은 특히 기억할 만합니다. 시위대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군인들이 그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동안 경찰도 군대도 없이 시민들이 도시를 관리했습니다.
5월 21일 다라사나 제염소에서는 이천오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줄지어 앞으로 걸어갔고, 경찰이 몽둥이로 내리쳤습니다. 맞으면 쓰러지고, 쓰러지면 뒷사람이 다시 걸어 나갔습니다. 손을 들어 막지도 않았습니다. 수백 명이 다쳤습니다. 이 장면이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협정은 맺어졌지만
1931년 3월 5일 간디-어윈 협정이 맺어졌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 인도 국민회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중단한다
- 영국은 이 운동으로 수감된 사람들을 석방한다
- 영국은 해안 인근 주민이 집에서 쓸 소금을 만드는 것을 허용한다
- 간디는 런던에서 열리는 원탁회의에 국민회의 대표로 참석한다
그런데 여기서 정직하게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금세 자체는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먹을 소금을 만드는 것만 허용됐을 뿐이고, 소금세가 실제로 없어진 것은 인도가 독립한 해인 1947년 4월 1일이었습니다. 십칠 년이 더 걸린 셈입니다.
그러니 소금 행진이 소금세를 없앴다고 말하면 사실과 다릅니다. 이 행진이 바꾼 것은 세율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길 수 없다고 여기던 것을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지요.
간디가 조선에 보낸 편지
이제 이 글을 쓰게 된 진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26년 10월 12일, 동아일보 사장이던 인촌 김성수가 간디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선을 위해 한마디 해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간디는 1926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에서 답장을 썼습니다. 소금 행진을 떠나기 삼 년 반 전, 바로 그 아슈람에서입니다. 이 답장은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자 2면에 간디의 사진과 친필 편지, 봉투와 함께 실렸습니다.
답장 전문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주신 편지는 받았나이다. 내가 보낼 유일한 부탁은 절대적으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짧습니다. 그런데 이 한 문장이 그때 조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혔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세 줄짜리 편지였지만, 그 안에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으니까요.
이 편지의 원본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2010년, 팔십사 년 만에 독일의 간디 기념 재단 자료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해 조선의 신문들
소금 행진이 있던 1930년, 조선 신문의 간디 관련 기사는 눈에 띄게 늘어납니다.
| 연도 | 조선일보 간디 관련 기사 수 |
|---|---|
| 1929년 | 35건 |
| 1930년 | 177건 |
| 1931년 | 165건 |
1930년 한 해에만 사설이 열세 건이었습니다. 소금 행진 직후인 그해 사월에는 「비군사적 불복종 운동과 고행의 간디씨」라는 기사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그 기사가 던진 질문이 이랬습니다. 왜 예순 살 노인이 직접 천 리 길을 걸어야 했는가.
간디를 부르는 말도 해마다 달라집니다. 1921년에는 인도 반영운동 거괴, 1923년 혁명아, 1928년 인도 애국지사, 1929년 인도 민족운동 선봉, 1931년 인도 국민운동 영수, 그리고 1932년에는 성웅(聖雄)이 됩니다.
한 연구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직접 표현하기 어려웠던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을 인도의 독립운동에 투사했다는 것입니다. 총독부 검열 아래에서 조선 이야기를 쓸 수 없으니 인도 이야기를 쓴 셈입니다.
조선의 간디라 불린 사람
실제로 간디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한 조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당 조만식입니다.
그는 1908년 도쿄 유학 시절 간디의 무저항주의를 접하고 이를 자기 운동의 거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국산품 애용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간디가 물레를 돌리며 영국산 옷감을 거부한 스와데시 운동과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백과사전은 그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평생을 기독교 정신의 실천가로 살았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조선의 간디라 불렀습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같은 날짜, 두 해 차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짚겠습니다.
인도가 독립한 날은 1947년 8월 15일입니다. 우리 광복절과 날짜가 같습니다. 다만 두 해 뒤이고, 두 사건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연의 일치입니다.
간디는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1948년 1월 30일, 델리에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흔여덟이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라진 것에 그는 끝까지 마음 아파했다고 합니다. 그해 노벨위원회는 평화상 수상자를 뽑지 않았습니다.
소금 한 줌을 집으려고 스물다섯 날을 걸은 예순 살 노인. 그 이야기를 그해 조선의 신문들이 그토록 열심히 읽고 옮겨 적었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출처 및 참고
· 행진 날짜, 출발 인원 78명, 행진단 명단(최연소 16세, 네팔인 2명 등), 경로와 하루 이동 거리, 아슈람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 행진 이후 사건 일지(네루 체포, 페샤와르, 간디 체포, 다라사나): 간디 유산 포털(Gandhi Heritage Portal, 사바르마티 아슈람 보존기념재단 운영), 『간디 전집』 제43권 대조본
· 거리 약 240마일(385킬로미터), 1930년 말 약 6만 명 수감, 다라사나 사태, 간디-어윈 협정 내용, 간디 생몰과 연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1882년 인도 소금법 조항, 세율, 노동자 가족의 부담, 1947년 4월 1일 소금세 폐지: 발라지(R. Balaji), 「식민지 인도의 소금세와 소금 행정」, 2023
· 간디가 조선에 보낸 답신(1926년 11월 26일 작성,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자 2면 게재, 2010년 원본 발굴): 인촌기념회(동아일보사) 문헌자료실
· 조선 신문의 간디 관련 기사 수와 호칭 변화, 1930년 4월 3회 연재: 조선일보 2026년 1월 30일자 기사 및 자사 아카이브 집계
· 조선 지식인의 투사 해석: 이옥순,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2006)
· 조만식의 간디 수용, 조선물산장려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만식」
· 인도 독립일(1947년 8월 15일), 인도독립법: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소금세가 영국령 인도 재정에서 차지한 비중은 자료에 따라 3퍼센트에서 10퍼센트까지 갈리고 어느 것도 1차 출처로 확인되지 않아 본문에 쓰지 않았습니다. 1930년 시점의 정확한 소금세 세율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행진 거리는 385킬로미터, 388킬로미터, 410킬로미터로 자료마다 다릅니다. 도착 시 인원은 실측 집계가 존재하지 않아 "수만 명"으로만 적었습니다. 간디의 나이는 만 60세와 61세가 함께 쓰입니다. 다라사나 사상자 수도 자료마다 달라 "수백 명이 다쳤다"로 적었습니다. 간디가 3·1운동이나 조선의 독립운동가를 언급한 기록은 위 1927년 답신 외에는 찾지 못했습니다.
싣지 않은 말 — 간디의 말로 널리 알려진 두 문장은 여러 검증 기관이 간디의 말이 아니라고 판정해 넣지 않았습니다.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945년 8월, 전쟁이 끝난 날 — 그해 여름의 두 얼굴 (0) | 2026.08.21 |
|---|---|
| 하룻밤 사이 도시를 가른 베를린 장벽, 1961년 그날의 여름 (0) | 2026.08.18 |
| 1962년 7월 10일, 하늘에 띄운 은빛 공 하나가 세상을 하나로 묶다 - 텔스타 1호 이야기 (0) | 2026.07.10 |
| 온 세상이 스마트폰을 들고 뛰던 그 여름, 포켓몬 GO 열풍 (2016년 7월 6일) (0) | 2026.07.06 |
| 아무도 몰랐던 반전 드라마, 1954년 '베른의 기적' 이야기 (0) | 2026.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