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여름, 세계 곳곳에서 공습을 알리던 사이렌이 멈췄습니다. 같은 여름, 이 땅에서는 삼십육 년 만에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한쪽에서는 전쟁이 끝났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라가 돌아왔습니다. 그해 팔월은 그렇게 두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팔월이 정확히 어떤 날들이었는지, 저는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날짜를 하나씩 짚어 보니 생각과 다른 대목이 여럿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열흘 사이에 일어난 일
먼저 그해 팔월의 연표입니다. 열흘 남짓한 사이에 세계가 뒤집혔습니다.
| 날짜 | 일 |
|---|---|
| 8월 6일 오전 8시 15분 | 히로시마에 우라늄 폭탄 투하 |
| 8월 8일 |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 |
| 8월 9일 오전 11시 2분 |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 투하 |
| 8월 9일 | 소련군 만주 침공 개시 |
| 8월 14일 | 일본, 포츠담 선언 수락 결정. 종전조서 녹음 |
| 8월 15일 정오 | 이른바 옥음방송. 녹음된 조서를 라디오로 재생 |
| 9월 2일 | 도쿄만 미주리함 함상에서 항복문서 서명 |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팔월 십오일이 아니라 구월 이일이 공식적인 항복일이라는 점입니다. 팔월 십오일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겠다고 방송으로 알린 날이고, 문서에 서명한 것은 보름 넘게 지난 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방송에 항복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표현이었고, 문어체 한문투라 당시 일본 사람들조차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라디오 음질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 여름의 사망자, 숫자로 남은 것
전쟁이 끝난 자리에는 숫자가 남았습니다. 다만 이 숫자들은 하나같이 추정치이고, 자료마다 폭이 큽니다.
히로시마시는 1945년 12월 말까지 약 십사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계하고 있습니다. 오차 범위 일만 명을 붙여 놓았습니다. 나가사키는 약 칠만 사천 명이라는 1950년 조사 결과가 가장 널리 쓰입니다.
다만 이 수치도 조사 기관과 시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미군이 종전 직후에 낸 추정은 히로시마 약 칠만 명, 나가사키 약 사만 명이었습니다. 신뢰할 만한 추정들을 모아 보면 두 도시 합쳐 십일만 명에서 이십일만 명 사이에 분포합니다. 어느 쪽이 조작이라기보다, 그날 도시 안에 몇 명이 있었는지를 아무도 정확히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체로 넓히면 숫자는 더 흐려집니다. 미국 국립제2차세계대전박물관의 공식 표는 전투 사망 천오백만 명, 민간인 사망 사천오백만 명으로 잡고 있습니다. 널리 인용되는 종합 추정은 칠천만 명에서 팔천오백만 명으로, 당시 세계 인구의 삼 퍼센트가 넘습니다. 박물관 자체가 "추정은 자료마다 크게 다르다"는 단서를 달아 두었습니다.
그 자리에 조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가장 오래 붙들었던 대목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조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노동자, 일자리를 찾아 건너간 사람,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히로시마시도 공식 자료에서 사망자 가운데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수를 아무도 확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출처 | 피폭 | 사망 | 귀국 |
|---|---|---|---|
| 일본 내무성 계통 자료 | 약 10만 명 | 약 5만 명 | 4만 3천 명 |
| 한국원폭피해자협회(1972년) | 약 7만 명 | 약 4만 명 | 2만 3천 명 |
| 대한민국 정부(2019년 발표) | 약 7만 명 | 약 4만 명 | 2만 3천 명 |
| 히로시마 한국인 위령비 비문 | - | 2만여 명 | - |
정부가 채택한 수치는 협회가 1972년에 내놓은 추정입니다. 한국과 일본 어느 정부도 당시에 실태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팔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한 숫자는 없습니다.
생존자에 대한 첫 정부 차원 실태조사는 2019년에야 나왔습니다. 2018년 8월 기준 등록 생존자는 2,283명이었고, 그중 칠십 대가 63퍼센트, 팔십 대가 33퍼센트였습니다. 거주지는 경남 31.8퍼센트, 부산 22.1퍼센트, 대구 14.3퍼센트로 경상도에 칠 할이 몰려 있습니다. 응답자의 23퍼센트가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51퍼센트가 자신의 건강이 나쁘다고 답했습니다.
8월 15일, 거리는 조용했습니다
이 대목은 저도 처음 알았을 때 좀 놀랐습니다.
우리는 흔히 팔월 십오일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진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그날 서울 거리는 대체로 조용했다는 것이 여러 증언과 연구의 결론입니다.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정오 방송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방송 내용이 난해해서 무슨 말인지 곧바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조선총독부 경찰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섣불리 나서기 어려웠습니다.
널리 알려진 만세 사진들은 팔월 십육일에 찍힌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총독부가 약속한 정치범 석방이 십육일에 이루어졌고,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오면서 그때부터 거리에 만세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팔월 십오일 아침에 확실히 있었던 일이 하나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여운형에게 치안권과 행정권을 맡긴 것입니다. 여운형은 다섯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 전국의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 세 달분 식량을 확보해 줄 것
- 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에 절대 간섭하지 말 것
- 학생과 청년을 훈련하고 조직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 것
-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 것
그리고 팔월 십칠일,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꾸려집니다. 광복은 방송 한 번으로 온 것이 아니라, 그 며칠 사이에 사람들이 만들어 간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광복이 되자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규모가 어마어마했습니다.
| 돌아온 곳 | 인원 |
|---|---|
| 일본 | 1,110,972명 |
| 북한 지역 | 859,930명 |
| 만주 | 304,391명 |
| 중국 | 71,611명 |
| 그 밖 | 33,917명 |
| 합계 | 2,380,820명 |
1945년 10월부터 1947년 12월까지의 집계입니다. 당시 남한 인구의 15.1퍼센트에 해당합니다. 1944년 5월 남한 인구가 1,587만 명이었는데 1949년 5월에는 2,018만 명이 되었습니다. 오 년 사이에 431만 명, 27퍼센트가 늘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종전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의 이십 퍼센트가 넘는 약 육십만 명이 일본에 남았습니다. 1946년 연합군 사령부는 귀국자가 가져갈 수 있는 돈을 천 엔 이내로 제한했습니다. 일본에서 어렵게 모은 재산을 두고 오라는 뜻이었으니, 돌아오지 못한 데는 이런 사정도 있었습니다. 사할린에 억류되어 끝내 오지 못한 조선인은 약 사만 육천 명으로 추산됩니다.
끌려간 사람들의 숫자
돌아온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는 그 앞의 숫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국무총리 소속으로 있던 강제동원 조사 위원회가 2016년에 낸 보고서를 보면, 이른바 위안부를 제외한 강제동원 피해는 연인원 약 칠백팔십만 명입니다. 같은 사람이 여러 번 동원된 경우가 중복으로 잡힌 수치입니다.
| 구분 | 인원 |
|---|---|
| 노무동원 (한반도 안) | 6,508,802명 |
| 노무동원 (한반도 밖) | 1,045,962명 |
| 군인동원 | 209,279명 |
| 군무원(군속) 동원 | 63,312명 |
한반도 밖으로 끌려가 현지에서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은 약 이십칠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동원된 사람의 13.5퍼센트입니다. 이 안에는 원폭으로 숨진 사만 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반도 안에서 숨진 사람과 돌아오는 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여기 들어 있지 않습니다.
도망친 사람도 많았습니다. 일본 내무성 조사로 1939년부터 1942년 사이에 25만 7,907명이 작업장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탈출을 시도한 비율은 1939년 2.2퍼센트에서 1943년 39.9퍼센트까지 올라갑니다. 열 명 중 네 명이 도망을 시도했다는 뜻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광복절이라는 이름
마지막으로 이름 이야기입니다.
팔월 십오일이 국경일이 된 것은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지면서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국회에 낸 원안에는 이날의 이름이 독립기념일로 적혀 있었습니다. 국회 심의를 거치면서 광복절로 바뀌었습니다. 같은 과정에서 헌법공포일은 제헌절이 되었습니다.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되찾은 것과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세워진 것을 함께 기념하는 날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같은 날짜에 두 가지 일이 겹친 셈입니다.
그해 여름을 직접 겪으신 분들이 이제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라디오를 들었던 분, 며칠 뒤에야 소식을 들었던 분, 배를 타고 돌아오신 분,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기다리신 분. 저마다 다른 팔월을 지나오셨을 겁니다. 그 여름의 기억이 있으시다면, 그것이 곧 기록입니다.
출처 및 참고
· 1945년 8월 연표, 옥음방송, 항복문서 서명(9월 2일): 일본 국립공문서관, 일본 궁내청(2015년 녹음 원판 공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국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 히로시마 사망자 약 14만 명(1945년 12월 말 기준): 히로시마시 공식 자료. 나가사키 73,884명: 1950년 나가사키시 원폭자료보존위원회 추계
· 두 도시 합계 추정 범위 11만~21만 명: 원자과학자회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2020년 8월
·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 미국 국립제2차세계대전박물관 공식 통계표
· 한국인 원폭 피해자 수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폭 피해자」, 한국원폭피해자협회 1972년 발표, 보건복지부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조사 결과」(2019년, 조사기간 2018년 6월~2019년 3월)
· 8월 15일 여운형과 총독부의 교섭, 다섯 가지 조건, 건국준비위원회 조직(8월 17일):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및 『신편 한국사』 52권
· 귀환자 통계: 조선은행 조사부 『조선경제연보』(1948), 통계청 『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사회상』(1993)
· 강제동원 규모: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위원회 『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201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인 강제동원」
· 광복절 국경일 제정: 「국경일에 관한 법률」 1949년 10월 1일 공포(법률 제53호), 국가기록원
확인하지 못한 것 / 엇갈리는 것 — 한국인 원폭 피해자 수는 출처에 따라 사망자가 2만 명에서 5만 명까지 크게 갈립니다. 한국과 일본 어느 정부도 당시 실태조사를 하지 않아 확정 수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총 사망자도 단일 공식 출처가 없어 자료마다 6천만 명에서 8천5백만 명까지 차이가 납니다. 8월 15일 당일 만세 시위가 없었다는 서술은 여러 증언과 언론 보도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 논문이나 정부기관 공식 서술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강제동원 총계도 같은 위원회 자료를 근거로 780만 명과 782만 명 두 수치가 함께 유통되고 있어 반올림해 적었습니다.
통계는 발표 시점 자료이며 이후 갱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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