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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이야기

옛날 국민학교, 도시락과 조개탄 난로가 있던 교실

by 인생의 쉼표 2026. 8. 23.

겨울 아침, 교실 한가운데 놓인 난로 위에는 양은 도시락이 층층이 쌓여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아래쪽 도시락은 눌어붙어 노릇한 누룽지가 되고, 위쪽은 아직 찬 기운이 돌았습니다. 서로 자기 도시락을 아래에 놓으려 실랑이하던 그 풍경은, 그 시절 국민학교를 다닌 이라면 누구나 간직한 추억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실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추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반에 예순 명이 앉았고, 교실이 모자라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썼고,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시절 교실을 기억과 함께 기록으로도 한 번 들여다보려 합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먼저 이름부터입니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의 이름이 왜 국민학교였는지, 저는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이 이름은 1941년 일제가 국민학교령을 시행하면서 붙은 것입니다. 그 전에는 소학교라고 불렀습니다. 전시 동원 체제 아래에서 이른바 황국신민을 길러 내겠다는 목적이 담긴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 광복이 되고도 오십 년 넘게 우리는 그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름이 바뀐 것은 1996년 3월 1일입니다. 교육부가 1995년에 방침을 발표하고 그해 말 법을 고쳐, 1996년 새 학기부터 초등학교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1996년 2월 29일이 국민학교라는 이름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시기학교 이름근거
1941년 이전소학교소학교령
1941년 ~ 1996년 2월국민학교1941년 국민학교령 시행
1996년 3월 1일 ~초등학교1995년 교육법 개정, 1996년 3월 1일 시행

손주가 다니는 학교 이름과 내가 다니던 학교 이름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학교는 그대로인데 이름만 바뀐 것이지요. 동창회 명부에 아직도 국민학교라고 적힌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한 반에 예순 명, 그리고 오전반 오후반

콩나물 교실이라는 말을 우리는 비유로 썼지만, 숫자로 보면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학급당 학생 수를 보면 1970년 전국 평균이 한 반에 62.1명이었습니다. 그 뒤로 조금씩 줄어 1980년 51.5명, 1990년 41.4명이 되었고, 한 반이 삼십 명대로 내려간 것은 1992년(39.9명)의 일입니다.

연도학급당 학생 수(전국 평균)
1970년62.1명
1980년51.5명
1990년41.4명
1992년39.9명
2007년29.2명

서울은 사정이 더했습니다. 서울시 통계를 정리한 자료를 보면 1965년 서울의 교실 하나당 학생 수는 143.8명이었습니다. 한 교실에 백마흔세 명이 함께 앉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실 하나를 두세 학급이 나누어 썼다는 뜻입니다. 오전반과 오후반이 생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사도 모자랐습니다. 같은 자료에서 서울의 교원 한 사람이 맡은 학생 수는 1964년 79.6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선생님 한 분이 팔십 명 가까이를 가르치신 겁니다. 회초리가 흔했던 시절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오가지만, 이 숫자를 보면 그때 교실이 어떤 조건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교실 부족은 1960년 기준으로 전국에 2만 6,786개였습니다. 정부가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을 두 차례(1962~1966년, 1967~1971년) 밀어붙인 것이 이 때문입니다. 다만 계획이 끝난 1970년대에도 2부제 수업은 지역에 따라 남아 있었습니다.

난로와 도시락, 기록에 남지 않은 기억

이 글을 쓰면서 조개탄 난로에 대한 공식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찾지 못했습니다. 학교 난방을 무엇으로 했는지, 난로 당번을 어떻게 정했는지를 기록해 둔 정부 문서를 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연탄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정부가 무연탄을 생활 연료로 쓰도록 정책을 편 것이 1953년부터이고, 1950년대 중반부터 연탄이 가정용 난방 연료로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1955년에 나온 십구공탄이 주종이었고, 1966년과 1974년에는 연탄 파동으로 값이 뛰고 물건이 없어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니 난로 이야기는 통계가 아니라 기억으로 남은 것입니다. 하얀 연통 이음매에서 새던 매캐한 연기, 아침 일찍 나와 불을 피우던 당번, 난로 옆자리를 차지하려던 다툼,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나던 김치 냄새. 이런 것들은 어느 문서에도 없지만, 그 시절을 지나온 분들의 기억에는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기록이 없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도시락은 언제 사라졌나

도시락 이야기가 나온 김에 급식 이야기도 해야겠습니다. 우리 세대에게 급식은 낯선 말이었지만, 사실 급식의 역사는 생각보다 깁니다.

시작은 원조였습니다. 1953년 유니세프 등에서 탈지분유를 지원해 매일 백오십만 잔가량을 나눠 주었습니다. 1963년에는 국제 구호기구가 보낸 곡물로 초등학생 백구십삼만 명이 지원을 받았고, 1966년에는 대상이 이백팔십만 명까지 늘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의 절반이 넘는 숫자입니다.

시기내용
1953년탈지분유 원조 급식 시작
1970년 9월유료급식 시작. 26원에 빵 140그램과 우유 180밀리리터
1977년급식 대상 약 130만 명(전체의 23퍼센트)
1981년 1월학교급식법 제정
1998년전국 모든 초등학교에서 급식 실시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초등학교에서 도시락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해는 1998년입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급식이 다 갖춰진 것은 2003년이고요. 우리가 도시락을 싸 다니던 시절은 그러니까 아주 긴 시간이었던 겁니다.

중간에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1977년 9월 크림빵으로 인한 집단 식중독이 발생해 서울에서 초등학생 7,862명이 앓았고 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일로 급식이 한동안 전면 중지되었습니다.

검정고무신에서 운동화로

신발도 시대를 말해 줍니다.

고무신이 우리나라에 자리 잡은 것은 1920년대입니다. 1922년 무렵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고무신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그때 미투리가 이십오 전이고 고무신이 사십 전이었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부터 육이오 무렵까지가 고무신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러다 1960년 무렵부터 운동화에 밀리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발 산업의 주력 제품이 완전히 운동화로 넘어갔습니다. 범표, 말표, 왕자표, 기차표 같은 이름들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다만 여기서도 정직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국민학생 가운데 고무신을 신은 아이가 몇 퍼센트였는지 같은 통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산업 전체의 흐름이 그러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입니다.

그 교실에서 배운 것

마지막으로 숫자 하나만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열두 살 이상에서 약 78퍼센트였습니다. 열 사람 가운데 여덟이 글을 읽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정부는 1954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문맹 퇴치에 나섰고, 1958년에는 4.1퍼센트까지 떨어졌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단서가 붙습니다. 당시 문맹을 벗어났다고 본 기준이 자기 이름 석 자를 쓰고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는 점을 국가기록원 자체가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숫자를 오늘의 기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초등학교 취학률도 함께 오릅니다. 육이오로 무너졌던 취학률은 1951년 86.2퍼센트였다가, 정부가 문교 예산의 대부분을 의무교육에 쏟아부은 끝에 1959년 96.4퍼센트에 이르렀다고 국가기록원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교육부 계열 지표는 1970년에 92퍼센트에 도달했다고 적고 있어 두 자료가 어긋납니다. 산출 기준이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어느 쪽이 맞다고 단정할 근거를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예순 명이 앉은 교실, 오전과 오후로 쪼개 쓴 교실, 난로 위에 도시락을 얹던 그 교실에서 우리나라는 글을 읽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 보면 초라한 교실이었지만, 거기서 이 나라의 바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 도시락 자리를 두고 다투던 그 아침이, 그저 그리운 옛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교실에 앉아 계셨던 분들께 이 글이 작은 안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출처 및 참고
· 국민학교 명칭 변경(1996년 3월 1일 시행), 학급당 학생 수(1970~2007년), 교실 부족 2만 6,786개(1960년), 취학률(1951년 86.2퍼센트, 1959년 96.4퍼센트), 문맹률(1945년 약 78퍼센트, 1958년 4.1퍼센트), 급식 연혁, 연탄 보급: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교육·생활 분야
· 서울 교실당 학생 수 143.8명(1965년), 교원 1인당 학생 수 79.6명(1964년): 서울연구원 「지표로 본 서울 변천 2003」. 전국 평균이 아니라 서울 기준입니다
· 1941년 국민학교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국가기록원. 법령 호수는 자료 간 표기가 뒤섞여 있어 생략했습니다
· 학교급식법 제정(1981년 1월 29일, 법률 제3356호): 국가법령정보센터
· 고무신과 운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확인하지 못한 것 — 조개탄 난로와 난로 당번 제도를 기록한 정부·공공기관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본문의 난로 이야기는 기억에 근거한 서술입니다. 연도별 2부제 학급 수와 비율, 국민학생의 고무신 착용 비율 통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취학률은 국가기록원(1959년 96.4퍼센트)과 교육부 계열 지표(1970년 92퍼센트)의 수치가 어긋나며, 산출 기준 차이로 보이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통계는 발표 시점의 자료이며 이후 갱신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