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역사 시리즈 ③] 새마을 운동과 정신 개조 (1970년대)](https://blog.kakaocdn.net/dna/3Zz81/dJMcah5E5fU/AAAAAAAAAAAAAAAAAAAAAMmByroP4i9YcrgWy8otwhuCHJLJ1d50D8NVcFllVX4H/img.pn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93458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xxscowpyPAW%2FtM9VPuhOv29A95c%3D)
1970년 겨울, 전국 3만 3천여 개 마을에 시멘트 335부대씩이 무상으로 내려갔습니다.
돈이 아니라 시멘트였습니다. 이 방식이 새마을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어떻게 시작됐나
1970년 4월 22일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가 처음 언급됩니다.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농한기를 이용해 시멘트가 배분됐습니다.
| 시기 | 내용 |
|---|---|
| 1970년 4월 |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제시 |
| 1970년 10월~1971년 6월 | 전국 3만 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부대씩 무상 지원 |
| 이후 | 성과가 좋은 1만 6,600개 마을에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 추가 지급 |
이 2차 배분이 핵심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마을에 똑같이 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잘한 마을에만 줬습니다.
마을끼리 경쟁이 붙었습니다. 옆 마을은 받는데 우리는 왜 못 받느냐는 말이 나왔지요.
무엇을 했나
거창한 사업은 아니었습니다. 마을에서 바로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을 안길을 넓히고 포장했습니다. 리어카가 다닐 수 있게요.
공동 빨래터와 우물을 만들었습니다. 물 길으러 멀리 가지 않아도 되게요.
담장을 고치고 지붕을 갈았습니다. 볏짚 대신 슬레이트나 함석으로요.
초가지붕이 사라진 것이 이때입니다. 지금 시골 풍경이 그때 만들어졌습니다.
근면 자조 협동
세 단어가 구호였습니다. 마을 회관마다 붙어 있었지요.
| 정신 | 뜻 |
|---|---|
| 근면 | 부지런히 일한다 |
| 자조 | 스스로 돕는다. 남이 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
| 협동 | 마을 사람이 함께한다 |
이 중에서 자조가 실질적인 원리였습니다.
정부가 재료만 주고 일은 주민이 했습니다. 인건비가 안 드는 방식이었지요.
노동력을 마을에서 댔기 때문에 적은 예산으로 넓게 퍼질 수 있었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 노래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아침마다 마을 스피커에서 나왔습니다. 그 소리에 일어나 나가서 일했습니다.
지금 들으면 낯설지만 당시에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 중에는 이 노래 첫 소절만 들어도 그 시절이 떠오른다고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도시와 공장으로도 번졌습니다
농촌에서 시작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시 새마을운동,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확대됩니다.
학교에도 들어왔습니다. 아침 청소와 질서 지키기 같은 것이 그 흐름이었습니다.
전 국민이 참여하는 형태가 되면서 성격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슬레이트 지붕의 문제
이 대목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당시 지붕 개량에 널리 쓰인 슬레이트에는 석면이 들어 있었습니다.
석면은 1급 발암물질입니다. 그때는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문제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오래된 시골집에 그 지붕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철거할 때는 함부로 깨면 안 됩니다. 가루가 날리면 위험합니다. 지자체에 슬레이트 처리 지원 사업이 있는 경우가 있으니 시청이나 군청에 문의하세요.
좋은 뜻으로 한 일이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도 기록해 둘 만한 부분입니다.
평가가 갈립니다
새마을운동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사업도 드뭅니다.
| 긍정 평가 | 비판 |
|---|---|
| 농촌 생활환경이 실제로 개선됨 | 위에서 내려온 관 주도 방식 |
| 적은 예산으로 넓은 지역에 적용 | 참여가 사실상 강제였다는 지적 |
| 주민 조직화와 자신감 | 농촌의 구조적 문제는 해결 못 함 |
| 개발도상국에 수출되는 모델이 됨 | 정권 정당화에 활용됐다는 비판 |
1970년대에도 농촌 쟁의가 있었습니다. 소득 문제와 농산물 가격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길이 넓어지고 지붕이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농사로 먹고사는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겪으신 분들 사이에서도 기억이 다릅니다. 마을이 달라졌다고 하시는 분이 있고, 부역에 시달렸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둘 다 그분들이 실제로 겪은 일입니다.
기록물은 남아 있습니다
당시 마을 단위로 작성한 사업 일지와 회의록이 상당수 보존돼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이 새마을운동 기록물을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인 고향 마을 이름으로 찾아보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님 이름이 적혀 있을 수도 있고요.
사진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마을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어르신께 여쭤볼 것들
이 시기를 겪으신 분이 아직 많으십니다. 지금 여쭈면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을은 시멘트를 받았는지, 그걸로 뭘 만들었는지 물어보세요.
지붕은 언제 갈았는지, 그전에는 어땠는지도 좋습니다.
새마을 지도자가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여쭤보시면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부역 나가는 게 어땠는지도 솔직히 물어보세요.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새마을 지도자라는 자리
마을마다 새마을 지도자를 뒀습니다.
공무원이 아니라 마을 주민이었습니다. 보수도 따로 없었습니다.
사업을 계획하고 주민을 모으고 일지를 쓰는 일을 맡았습니다. 부녀회장도 함께 활동했고요.
이 자리를 맡았던 분들은 대개 마을에서 신망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부담도 컸습니다. 주민을 설득하고 때로는 재촉해야 했으니까요. 이웃과 얼굴을 붉힌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향 마을의 새마을 지도자가 누구였는지 여쭤보면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분들의 기억이 이 운동의 실제 모습에 가깝습니다.
통일벼도 같은 시기입니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기억되는 것이 통일벼입니다.
수확량이 많은 품종을 들여와 보급했습니다. 1970년대에 쌀 자급을 이룬 배경으로 꼽힙니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사라진 것이 이 무렵입니다. 봄에 곡식이 떨어져 굶던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었지요.
다만 통일벼는 밥맛이 떨어진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추위에도 약했고요.
심으라고 권장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나중에 쌀이 남게 되면서 통일벼는 밀려납니다. 배를 채우는 문제가 해결되자 맛을 따지게 된 것이지요.
어르신께 보릿고개를 겪으셨는지 여쭤보세요. 그 시절 봄에 무엇을 드셨는지 물어보시면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리하면
1970년 4월 지방장관회의에서 시작돼 그해 10월부터 전국 3만 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부대씩이 배분됐습니다.
이듬해에는 성과가 좋은 1만 6,600개 마을에만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추가로 줬습니다. 경쟁을 붙인 방식입니다.
마을 안길, 빨래터, 우물, 지붕 개량이 주된 사업이었고 근면·자조·협동이 구호였습니다.
생활환경은 실제로 바뀌었지만 농촌의 구조적 문제는 남았습니다. 지붕에 쓴 슬레이트의 석면 문제도 뒤에 드러났습니다.
출처 및 기준일
· 1970년 4월 22일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제시, 1970년 10월~1971년 6월 전국 3만 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부대씩 무상 지원, 이후 성과 우수 1만 6,600개 마을에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 지급, 마을 안길·공동 빨래터·우물·담장·지붕 개량 등 사업 내용, 근면·자조·협동의 3대 정신: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새마을운동 1970」,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기록물」
· 슬레이트 지붕의 석면 문제, 1970년대 농촌 쟁의 관련 지적: 위 자료 및 관련 백과 항목
확인하지 못한 것 — 새마을운동의 총 투입 예산과 농가 소득 변화 같은 성과 지표는 이 글에서 확인하지 못해 수치를 적지 않았습니다. 새마을운동의 평가는 연구자와 정치적 입장에 따라 크게 갈리므로 어느 한쪽을 결론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석면 슬레이트 처리 지원 사업의 유무와 조건은 지자체마다 다르니 거주지 시청·군청에 확인하세요. 새마을운동 기록물의 공개 범위와 열람 방법은 국가기록원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p
해외로 나간 새마을운동
이 운동이 나중에 수출 품목이 됩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 농촌 개발 모델로 전해졌습니다. 연수를 받으러 한국에 오는 공무원들도 있습니다.
적은 예산으로 주민을 조직해 성과를 낸 사례라는 점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다만 그 나라의 사정이 1970년대 한국과 같지 않습니다. 그대로 옮겨서 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있습니다. 등재 자체가 운동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기록의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
'한국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강의 기적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1988 서울 올림픽이 바꾼 대한민국의 위상 (1) | 2026.05.30 |
|---|---|
| 1980년대, 넥타이가 거리를 뒤덮던 그 뜨거웠던 날들 (0) | 2026.05.29 |
| 사막을 달군 아버지들의 뜨거운 눈물 (0) | 2026.05.28 |
| 2편: 한강의 기적, 맨손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청춘들의 기록 (0) | 2026.05.26 |
| 1편: 잿더미 위에서 핀 꽃, 1950년의 기억 (0) | 2026.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