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현대사

사막을 달군 아버지들의 뜨거운 눈물

by 인생의 쉼표 2026. 5. 28.

[시니어 역사 시리즈 ④]중동 건설 붐과 외화벌이 (1970년대)
[시니어 역사 시리즈 ④]중동 건설 붐과 외화벌이 (1970년대)

1975년에 6천 명이던 중동 파견 근로자가 1978년에는 1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삼 년 만에 열여섯 배가 넘게 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기름값이 오르면서 시작됐습니다

1973년 오일쇼크로 기름값이 폭등합니다. 한국 같은 나라에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유국에는 반대였습니다. 돈이 넘쳐 났습니다.

그 돈으로 도로를 깔고 항만을 짓고 도시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공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공사를 따낸 것이 본격적인 시작으로 꼽힙니다.

기름값 때문에 죽을 뻔한 나라가 그 기름값 덕에 외화를 벌게 된 셈입니다.

숫자로 보면

항목 내용
파견 근로자 1975년 약 6천 명 → 1978년 10만 명 육박, 한때 20만 명
누적 인원 1985년까지 약 100만 명
해외 건설 수주액 1975년 7억 5천만 달러 → 1980년 82억 달러

수주액이 5년 만에 열 배 넘게 늘었습니다.

누적 100만 명이라는 숫자를 보시면 감이 오실 겁니다. 그 시절 웬만한 집에 중동 다녀온 사람이 하나씩은 있었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시험을 봐서 갔습니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쟁이 심해서 시험을 치르고 뽑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기능 시험과 신체검사를 거쳤습니다.

월급이 국내의 몇 배였으니 사람이 몰렸습니다. 몇 년 고생하면 집을 산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실제로 그 돈으로 집을 마련하거나 자식 학비를 댄 집이 많습니다.

그곳에서의 하루

낮 기온이 오십 도 가까이 올라가는 곳이었습니다.

한낮에는 일을 못 하니 새벽에 나가고 저녁에 다시 일하는 식으로 시간을 나눴다고 합니다.

숙소는 캠프였습니다. 여럿이 한방을 썼고요.

술을 금지하는 나라라 회식 문화도 없었습니다. 일 끝나면 딱히 할 것이 없었지요.

가족과 연락하는 방법은 편지였습니다. 오가는 데 몇 주가 걸렸습니다. 전화는 비싸서 아주 가끔이었고요.

그 몇 년 동안 아이가 자라는 것을 못 본 아버지들이 많았습니다. 돌아왔더니 아이가 아버지를 낯설어했다는 이야기가 흔합니다.

남은 것과 잃은 것

외화를 벌어 온 것이 가장 큰 성과로 꼽힙니다.

기술도 남았습니다. 대형 항만과 플랜트 공사를 해 본 경험이 뒤에 우리 건설업의 밑천이 됐습니다.

다만 대가도 있었습니다.

사고가 적지 않았습니다. 더위와 무리한 공기가 겹쳤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가족이 몇 년씩 떨어져 지내면서 생긴 문제도 있었습니다. 돈은 벌었는데 집이 흔들린 경우지요.

왜 한국 업체가 따냈나

당시 중동 공사를 두고 여러 나라가 경쟁했습니다.

한국이 이긴 이유로 흔히 꼽히는 것이 공사 기간입니다. 남들보다 빨리 끝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야간 작업과 교대 근무로 시간을 벌었습니다. 밤에 조명을 켜고 일하는 모습이 현지에서 화제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도 요인이었습니다.

다만 무리한 공기 단축이 사고와 부실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빨리 한 것이 다 좋은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붐이 끝난 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흐름이 꺾입니다.

유가가 내려가면서 산유국의 발주가 줄었습니다. 경쟁도 치열해졌고요.

1985년 무렵에는 중동 붐이 사그라듭니다.

돌아온 분들 중에는 그 돈으로 자리를 잡은 경우도 있고, 마땅한 일자리를 못 찾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특수한 환경에서 일하다 돌아오니 국내 적응이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어지는 이야기

중동 건설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사우디의 대규모 개발 계획이 나오면 제2의 중동 붐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다만 그때와는 조건이 다릅니다. 단순 시공보다 설계와 기술이 중요해졌고, 인건비 경쟁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기대만큼의 성과가 날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시각도 있습니다.

아버지께 여쭤볼 것들

중동에 다녀오신 분이 지금 칠십 대에서 팔십 대이십니다.

어느 나라 어느 현장이었는지 여쭤보세요. 사우디, 리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 여러 곳이었습니다.

무슨 공사를 했는지, 무슨 일을 맡으셨는지도요.

거기서 뭘 드셨는지 물어보면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치를 어떻게 구했는지 같은 것들이요.

첫 송금을 얼마 하셨는지, 그 돈으로 집에서 뭘 했는지도 좋습니다.

사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장에서 동료들과 찍은 것들이요. 스캔해 두시면 좋습니다.

어머니 쪽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편이 몇 년 나가 있는 동안 집을 지킨 분들이 계십니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고 시부모를 모셨습니다. 그것도 이 역사의 절반입니다.

송금이 오면 어떻게 관리하셨는지, 그 돈으로 무엇을 먼저 하셨는지 여쭤보세요.

중동 이야기는 대개 아버지 쪽으로만 기억됩니다. 어머니 쪽 기억도 같이 남기시면 좋겠습니다.

월급은 집으로 갔습니다

중동에서 번 돈은 본인이 쓰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현지에서는 쓸 데가 없기도 했습니다. 술도 없고 놀 곳도 없었으니까요.

대부분 국내로 부쳤습니다. 회사가 국내 계좌로 바로 넣어 주는 방식도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집을 사고, 논밭을 늘리고, 자식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지금 오십 대에서 육십 대 되신 분들 중에 아버지가 중동에서 보낸 돈으로 대학을 나온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본인이 쓰려고 번 돈이 아니었다는 점이 이 시기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기록으로 남기는 법

남길 것 방법
현장 사진 휴대전화로 촬영해 보관. 뒷면 메모도 함께
편지 주고받은 편지가 있으면 사진으로 남기기
증언 어느 나라 어느 현장이었는지부터 녹음
서류 여권, 계약서, 급여 명세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음

이런 자료는 개인의 기록이면서 그 시대의 자료이기도 합니다.

해외 건설 관련 협회나 기관에서 자료를 모으는 경우가 있으니 문의해 보셔도 됩니다.

파독과 무엇이 달랐나

구분 파독 광부·간호사 중동 건설
시기 1960~1970년대 1970~1980년대
고용 형태 현지 기업에 개인이 고용 한국 건설사가 공사를 수주해 인력 파견
규모 합쳐서 약 2만 명 누적 약 100만 명
정착 독일에 남은 경우가 상당수 공사가 끝나면 대부분 귀국

파독은 개인이 취업해 나간 것이고, 중동은 회사가 공사를 따내 사람을 데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파독 근로자 중에는 현지에 정착해 가정을 이룬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독일에 한인 사회가 있는 이유입니다.

중동은 캠프 생활을 하다 계약이 끝나면 돌아왔습니다. 정착이 애초에 불가능한 구조였고요.

규모로 보면 중동이 훨씬 컸습니다. 그런데 파독 쪽이 더 자주 이야기되는 편입니다.

정리하면

1973년 오일쇼크로 산유국에 돈이 몰리면서 건설 수요가 생겼고, 그해 삼환기업의 사우디 고속도로 공사가 시작이 됐습니다.

파견 근로자는 1975년 6천 명에서 1978년 10만 명 가까이로 늘었고, 1985년까지 누적 약 100만 명이 다녀왔습니다.

해외 건설 수주액은 1975년 7억 5천만 달러에서 1980년 82억 달러로 늘었습니다.

외화와 기술이 남았지만 산업재해와 가족 이별이라는 값도 함께 치렀습니다.


출처 및 기준일
· 중동 파견 근로자 1975년 약 6천 명에서 1978년 10만 명 육박, 한때 20만 명, 1985년까지 누적 약 100만 명, 해외 건설 수주액 1975년 7억 5천만 달러에서 1980년 82억 달러, 1973년 삼환기업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공사 수주: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중동 건설 붐 1973~1982」, 경향신문 관련 기사, 국가기록원 「해외 인력파견」
· 사우디 파견 근로자 선발 시험: 한국농정신문 관련 기사
확인하지 못한 것 — 중동 파견 근로자의 임금 수준과 국내 임금과의 배수, 산업재해 및 사망자 통계는 이 글에서 확인하지 못해 수치를 적지 않았습니다. 현지 기온과 근무 방식, 숙소 생활에 관한 서술은 여러 회고에서 공통으로 언급되는 내용이나 공식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외화수입 대비 비중은 자료마다 기준과 수치가 달라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최근의 중동 사업 전망은 평가가 엇갈리므로 특정 견해를 결론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p

어느 나라에 갔나

주요 진출국 대표적인 공사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항만, 주택단지
리비아 도로, 상수도, 대수로
이라크 도로, 발전소
쿠웨이트 항만, 건축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장 컸습니다. 처음 문을 연 곳이기도 하고요.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사막 아래 물을 끌어오는 대규모 사업으로 오래 회자됐습니다.

나라마다 사정이 달랐습니다. 전쟁이 나거나 정세가 불안해져 공사가 중단되고 대금을 못 받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느 현장에 있었느냐에 따라 겪은 일이 아주 다릅니다. 그래서 한 분의 경험으로 전체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