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역사 시리즈 ②] 1960~1970년대 한강의 기적, 맨손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청춘들의 기록](https://blog.kakaocdn.net/dna/dNSkEA/dJMb99NfdhG/AAAAAAAAAAAAAAAAAAAAAKELUGYG9HUnuRP90tHZqdU0G6_Y4Lkrm0cA1W2HYBAT/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93458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16is5OL9o4uwUciMccF7izF4b%2B0%3D)
1963년, 서독에 보낼 광부 500명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습니다.
지원자가 4만 6천 명 몰렸습니다. 그 시절 대한민국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 숫자 하나로 짐작이 됩니다.
독일로 간 사람들
| 구분 | 기간 | 인원 |
|---|---|---|
| 광부 | 1963~1977년 | 7,936명 |
| 간호요원 | 1960~1976년 | 11,057명 |
광부보다 간호요원이 더 많았습니다. 파독이라고 하면 광부부터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습니다.
1963년 한독 근로자 채용 협정에 따라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500명 뽑는 데 4만 6천 명이 왔다는 것은 경쟁률이 90 대 1을 넘었다는 뜻입니다. 대졸자도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들이 보낸 돈
이분들이 고국으로 부친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약 1억 15만 달러로 집계됩니다.
1965년부터 1967년 사이 이 송금액은 총수출액의 2퍼센트 안팎을 차지했습니다.
이 대목은 조심해서 봐야 합니다. 나라를 먹여 살린 돈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외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기에 2퍼센트는 작은 비중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돈은 대부분 각 가정으로 갔습니다. 동생 학비가 되고, 집을 사는 밑천이 됐지요.
계획을 세워서 밀어붙였습니다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됩니다.
제1차는 1962년에서 1966년까지였습니다. 그 뒤로 5년 단위로 계속 이어집니다.
핵심은 수출이었습니다. 내수 시장이 작으니 밖에 팔아야 했습니다.
가발, 합판, 신발, 섬유부터 시작했습니다. 기술이 없어도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이었지요.
구로공단의 재봉틀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 구로에 수출산업공단이 들어섭니다.
여기서 일한 사람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십 대 후반, 이십 대 초반 여성이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재봉틀을 돌렸습니다. 월급을 받으면 대부분 집으로 부쳤고요.
오빠나 남동생 학비를 대느라 정작 본인은 학교를 못 간 경우가 흔했습니다. 야학에 다닌 분들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지금 칠십 대 여성 어르신 중에 이 시절을 보내신 분이 많습니다. 여쭤보면 그때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공업으로 넘어가다
가발과 신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부가가치가 낮으니까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방향을 바꿉니다. 철강, 조선, 화학, 기계 같은 중화학공업입니다.
| 시기 | 주력 |
|---|---|
| 1960년대 | 가발, 합판, 신발, 섬유 |
| 1970년대 | 철강, 조선, 석유화학, 기계 |
공장 하나 세우는 데 드는 돈이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빚을 내서 지었습니다.
당시 해외에서는 무모하다는 평이 많았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선택이 뒷날 조선업과 철강업의 바탕이 됐습니다.
새마을운동의 두 얼굴
1970년대 새마을운동도 이 시기 이야기입니다.
지붕을 갈고 길을 넓히고 마을 안길을 포장했습니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뀐 것이 이때입니다.
새벽에 종이 울리고 마을 사람들이 나와 함께 일했습니다.
다만 평가가 하나로 모이지는 않습니다. 농촌 환경을 크게 바꿨다는 평가가 있는 한편, 위에서 밀어붙인 방식이었고 참여가 강제적이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겪으신 분들 사이에서도 기억이 다릅니다. 좋았다는 분도 있고 고생만 했다는 분도 계십니다.
대가도 있었습니다
빠른 성장에는 값이 따랐습니다. 이 부분을 빼면 절반만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노동시간이 길었습니다. 주 육일 근무에 야근이 예사였고, 하루 열두 시간 넘게 일한 공장도 있었습니다.
산업재해가 많았습니다. 안전 장비가 부족했고 관리도 느슨했습니다.
도시로 사람이 몰리면서 농촌은 비어 갔습니다. 지금의 지방 소멸이 그 시기에 시작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이 이 시기의 노동 조건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성장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 그 값을 치렀는지는 같이 기억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왜 이렇게 빨랐나
한 가지 이유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러 요인이 겹쳤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 요인 | 내용 |
|---|---|
| 교육 | 가난해도 학교는 보냈다. 읽고 쓰는 인력이 있었음 |
| 수출 중심 | 좁은 내수 대신 해외 시장을 겨냥 |
| 국제 여건 | 세계 경제가 팽창하던 시기와 겹침 |
| 자본 조달 | 차관과 해외 송금, 베트남 파병 대가 등 |
이 가운데 무엇이 결정적이었는지는 학자마다 견해가 갈립니다.
정부 주도를 강조하는 쪽과 기업·노동자의 역량을 강조하는 쪽이 다릅니다. 한쪽 설명만 옳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이 시기를 상징하는 두 가지 사업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에 개통됩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길이 뚫리면서 물류가 달라졌습니다.
착공 당시에는 반대가 많았습니다. 차도 별로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가 웬 말이냐는 것이었지요.
포항제철은 1968년에 설립돼 1970년대 초에 첫 쇳물을 뽑아냅니다.
철을 자급하지 못하면 자동차도 배도 만들 수 없습니다. 제철소가 먼저 있어야 나머지가 가능한 구조였습니다.
두 사업 모두 무리한 투자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뒷날 산업의 토대가 됐습니다.
다만 공사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이 있었다는 점도 함께 기록돼 있습니다.
그 시절을 물어보는 법
어르신께 옛날 이야기 해 달라고 하면 대개 별거 없다고 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여쭤야 나옵니다.
첫 월급이 얼마였는지, 그 돈으로 뭘 하셨는지 물어보세요. 액수는 정확히 기억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서울에 올라오셨는지, 기차였는지 버스였는지도 좋습니다.
공장 이름, 기숙사 방에 몇 명이 잤는지, 쉬는 날 뭘 했는지 같은 것들이요.
큰 역사보다 이런 것이 더 오래 남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들
구로공단 자리는 지금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었습니다. 근처에 그 시절을 다룬 전시 공간이 있습니다.
파독 근로자 관련 기념 시설도 있습니다. 파독 광부·간호사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 둔 곳입니다.
국가기록원 온라인에서도 그 시기의 사진과 문서를 볼 수 있습니다. 집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어요.
운영 시간과 위치는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에 확인하세요.
베트남 파병도 이 시기입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에 군을 보냅니다.
파병 대가로 차관과 경제 지원이 들어왔고, 군납과 건설 참여로 외화를 벌었습니다.
파병 장병들이 보낸 송금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 부분은 평가가 무겁습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나왔고, 고엽제 피해가 뒤에 드러났습니다.
현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도움이 됐다는 사실과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는 함께 봐야 합니다. 한쪽만 말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1963년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천 명이 지원했습니다. 광부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6명, 간호요원은 1960년부터 1976년까지 11,057명이 나갔습니다.
이들의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67년 사이 총수출액의 2퍼센트 안팎이었습니다.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수출에 초점을 뒀고,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으로 넘어갑니다.
긴 노동시간과 산업재해, 농촌 공동화라는 값도 함께 치렀습니다.
출처 및 기준일
· 파독 광부 1963~1977년 7,936명, 간호요원 1960~1976년 11,057명, 1963년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지원자 약 4만 6천 명, 1965~1975년 송금액 약 1억 15만 달러, 1965~1967년 송금액의 총수출액 대비 비중 1.6~1.9퍼센트: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해외 인력파견」 및 관련 연구 자료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1차 1962~1966년 및 이후 차수: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보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확인하지 못한 것 — 수출액이 1억 달러와 100억 달러를 넘어선 연도는 이 글에서 확인하지 못해 적지 않았습니다. 구로수출산업공단의 정확한 조성 연도와 근로자 규모, 새마을운동의 성과 지표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고도성장의 원인과 새마을운동의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크게 갈리므로 한쪽 설명만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기념 시설의 운영 정보는 각 기관에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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