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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1980년대, 넥타이가 거리를 뒤덮던 그 뜨거웠던 날들

by 인생의 쉼표 2026. 5. 29.

[시니어 역사 시리즈 ④] 민주화 운동의 격동기 (1980년대)

1987년 6월, 명동과 종로의 빌딩에서 양복 입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학생 시위인 줄 알았던 것이 그 순간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넥타이 부대라는 말이 그때 생겼습니다.

그해 1월, 한 대학생이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숨졌습니다.

당국은 처음에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취지로 발표했습니다.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해명은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죽음 자체만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시민을 죽여 놓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그해 6월까지 이어지는 흐름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6월 9일, 또 한 명이 쓰러졌습니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집회 도중 최루탄에 맞아 이한열이 쓰러졌습니다.

동료가 그를 부축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한 장이 여론을 바꿨습니다.

다음 날인 6월 10일부터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집니다. 6월 항쟁의 시작입니다.

넥타이 부대가 나온 이유

그전까지 시위는 대학생과 재야 인사의 일로 여겨졌습니다. 직장인은 지켜보는 쪽이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회사에 알려지면 곤란해지니까요.

그런데 두 청년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감정이 퍼졌습니다.

사무실 창문으로 최루탄을 피해 뛰는 학생들을 내려다보던 사람들이,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왜 결정적이었나

구분 넥타이 부대 합류 전 합류 후
참여층 대학생, 재야 중심 직장인, 상인, 일반 시민까지
정권의 규정 일부 세력의 소요 규정하기 어려워짐
진압 부담 비교적 낮음 중산층을 상대해야 함

정권 입장에서 학생 시위는 불순 세력의 소요로 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행원과 회사원이 거리에 서면 그 논리가 안 통합니다. 이들은 체제를 지탱하던 사람들이니까요.

중산층이 등을 돌렸다는 신호였고, 그것이 무력 진압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6월 29일, 항복 선언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합니다.

주요 내용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
김대중 사면 복권
시국 관련 인사 석방
기본권 신장

핵심은 직선제였습니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다는 것, 그것이 6월 내내 거리에서 외친 요구였습니다.

스무 날 남짓한 시위가 헌법을 바꿨습니다.

그 시절 거리의 풍경

겪지 않은 세대는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최루탄 냄새입니다. 도심에 하루 종일 매캐한 것이 깔려 있었습니다. 시위와 상관없이 그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눈물이 났습니다.

상인들은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장사가 안 되니 시위대를 반가워하지 않은 분도 많았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던 것처럼 기억하는 것은 나중에 정리된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약국에서 치약을 나눠 주고, 식당에서 물을 내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눈에 치약을 바르면 덜 맵다고들 했지요.

전경과 시위대가 밀고 밀리는 사이에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가 있었습니다. 역사책에는 그 부분이 잘 안 남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공장에서도 터졌습니다

6월 항쟁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전국의 공장에서 파업이 이어집니다. 노동자 대투쟁이라고 부릅니다.

거리에서 얻어 낸 것이 정치적 권리였다면, 이번에는 일터에서의 권리였습니다. 임금, 노동시간,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지 같은 문제였지요.

울산과 마산, 창원의 큰 공장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6월에 넥타이를 매고 나섰던 사람과 7월에 작업복을 입고 섰던 사람은 대체로 같은 세대입니다. 순서만 달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해 12월에는

직선제를 얻어 냈으니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1987년 12월입니다.

결과는 여당 후보 노태우의 당선이었습니다. 거리에서 싸운 쪽이 이기지 못했습니다.

야권이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갈렸기 때문입니다. 단일화가 안 됐습니다.

이 대목을 두고 지금도 평가가 갈립니다. 누구의 책임이 큰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다만 제도를 바꾸는 것과 그 제도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다른 일이라는 점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래도 직선제 자체는 남았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우리는 대통령을 직접 뽑고 있습니다.

1980년 광주가 앞에 있었습니다

1987년만 떼어 놓고 보면 안 됩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먼저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당시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7년 동안 진실이 조금씩 퍼졌습니다. 유인물로, 사진으로, 입에서 입으로요.

1987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7년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표로 보면

시기 일어난 일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
1987년 1월 박종철 사망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최루탄 피격
1987년 6월 10일~ 전국에서 6월 항쟁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 직선제 수용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1987년 12월 직선제 대통령 선거

1987년 한 해에 이 모든 일이 들어 있습니다.

그 세대가 지금 시니어입니다

1987년에 서른 살이었던 사람은 지금 일흔 즈음입니다.

낮에는 수출품을 만들고 밤에는 거리에 섰던 세대입니다.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한 세대 안에 겪었습니다.

두 가지를 한 세대에 해낸 나라가 흔치 않습니다. 그 안에 이분들의 이십 대와 삼십 대가 통째로 들어 있습니다.

지금 찾아갈 수 있는 곳

이 시기를 눈으로 보고 싶으시면 몇 군데가 남아 있습니다.

박종철이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은 지금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조사실이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연세대 안에는 이한열을 기리는 공간이 있습니다.

서울 명동성당은 6월 항쟁 당시 농성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광주에는 5·18 관련 시설과 국립 5·18 민주묘지가 있습니다.

운영 시간과 관람 방법은 기관마다 다르니 가시기 전에 확인하세요. 손주와 함께 가시면 설명해 주실 것이 많을 겁니다.

그때 어디 계셨는지 물어보세요

이 시기를 겪으신 분들은 대개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십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한 번 나가 봤을 뿐이라고요.

그래도 여쭤보면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회사에 다녔고, 그날 점심시간에 뭘 봤고, 무서웠는지 아닌지 같은 것들이요.

교과서에는 6월 항쟁 한 줄로 적히지만, 실제로는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된 일입니다.

기록해 두시면 좋습니다. 나중에는 여쭐 수 없게 됩니다.

휴대전화로 녹음만 해 두셔도 됩니다. 정리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거리에 안 나가셨던 분의 이야기도 남길 만합니다. 왜 못 나갔는지,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도 그 시대의 기록이니까요.

정리하면

1987년 1월 박종철 사망, 6월 9일 이한열 피격, 6월 10일부터 전국 시위, 6월 29일 직선제 수용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학생들만의 싸움이 국민 전체의 일이 된 지점에 넥타이 부대가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1980년 광주가 있었고, 그 7년의 시간이 1987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여름에는 공장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졌고, 12월 선거에서는 야권 분열로 여당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제도를 바꾸는 것과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다른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직선제는 남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대통령을 직접 뽑는 것이 그해 6월에서 왔습니다.


출처 및 기준일
·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 중 사망,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집회 중 이한열 최루탄 피격,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의 6·29 선언(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 김대중 사면 복권, 시국 관련 인사 석방, 기본권 신장 등):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1987년 6월 항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월항쟁」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위 자료
확인하지 못한 것 — 넥타이 부대의 참여 규모나 시위 참가자 수를 보여주는 공식 통계는 이 글에서 확인하지 못해 숫자를 적지 않았습니다. 6·29 선언의 배경과 성격에 대해서는 자발적 결단으로 보는 시각과 항쟁에 밀린 결과로 보는 시각이 갈립니다. 1987년 12월 대선의 득표율과 야권 단일화 실패의 책임 소재도 평가가 엇갈리므로 구체적인 수치를 적지 않았습니다. 기념 시설의 운영 시간과 관람 방법은 각 기관에 확인하세요.